이 글(사진)은 백운님의 블로그에서 복사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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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답사할 곳은 고봉 기대승선생을 봉향하는 월봉서원이다.
임곡우회도로가 끝나는 부분에서 임곡에서 내려오는 고가도로와 만나고
그부분에서 다리를 건너 좌회원해서 가면 용진산으로 가는 길이고
조금 더가면 장성으로 직진하는 길과 상무대방향으로 좌회전하는 삼거리가 있는데
이 삼거리에서 장성방향 직진하는 길로 조금만(20m 정도)더 가면
철길 아래 굴다리로 가는 우회전길이 있다.
이 길로 들어서서 철길을 따라 1km 정도 가다보면 길가에 월봉서원이라는
바위로 된 안내판이 있고 이 안내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이
너브실(광곡)마을이다.
이 마을위로 계속 올라가면 갑자기 넓은 주차장이 나오고
월봉서원이 시원스럽게 시야에 들어온다.
월봉서원의 정문인 망천문이다.
고봉선생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로
이조 중종 22년(1527~1572) 11월 18일 광주시 소고룡리(지금의 新龍洞)에서 출생하였다.
고봉선생은 독학으로 32세에 문과을과에 장원하여 관계에 진출하였고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 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46세에 타계하였다.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고봉선생의 문집으로는 경연강론을 모은 논사록(論思錄)과 주자문록 등
다수가 있는데 이조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퇴계 이황선생과의 8년에 걸친 사칠이기왕복론변(四七理氣往複論辨)은 유명하다.
월봉서원은 1654년(이조 효종 5년) 사액(賜額)되었다.
- 안내문에서-
빙월당에 관한 안내문
빙월당은 월봉서원의 강당인데
정조가 기대승의 고결한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에 비유하여
빙월당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빙월당.
백우산 자락의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쌓인 빙월당.
단청을 하지 않고 목재 그대로의 건물이라 더욱 차분하고
빙월당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한여름에도 조선조 선비의
날서있고 차가운 삶의 결기가 느껴져 온다.
우측에 있는 동재(東齋)인 명성재
좌측에 있는 서재(西齋)인 존성재
빙월당 왼쪽에 있는 장판각.
장판각에는 고봉집, 논사록, 왕복서, 이기왕복서 등 목판 474매가 보관되어 있다.
빙월당 툇마루 너머로 보이는 장판각.
명종 13년(1558년) 당시 58세이던 성균관 대사성 퇴계 이황은
32살이던 이제 갓 정계에 입문한 햇병아리같은 선비 한사람을 만난다.
당시 퇴계 이황은 임금도 존경하는 당대의 거유였다.
장유유서의 유교적 질서가 엄존하는 때
그 앞에서 머리들기에도 어려울텐데
햇병아리 선비는 대선배 앞에서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자기 주장을 분명하게 얘기한다.
이 때 부터 8년 동안 12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때로는 만나서 밤을 지새우면서 학문에 대해 논의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논쟁이다.
나이와 직위를 초월한 영혼의 교류.
조선 최고의 사상로맨스라고 불리우는 이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대 사건이었다.
그 당시 퇴계와 고봉이 사회적 지위와 사상적 배경이 현저히 달랐으나
논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퇴계의 온후한 성격, 넉넉한 마음과 고봉의 불같은 열정, 학문에 대한 도전,
그리고 논쟁이전에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이라 할 수 있다.
퇴계가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이었지만 퇴계는 그를 제자로서보다는 학우로 대하였으며,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대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사상논쟁을 벌이면서도 서로를 얼마나 존경했는가는
문헌 곳곳에 남아있다.
청년 기대승이 편지로 당대의 대유학자인 이황과 논쟁을 벌이다가
드디어 직접 만나뵙고 광나루까지 이황을 전송하며 시를 읊었다.
"한강은 도도히 쉼없이 흐르는데 선생의 가심을 어찌 말리랴.
모랫가 머뭇거리며 돛 당기는 곳에서 이별의 슬픔 헤아릴 수도 없네"
또한 퇴계는 고봉을 만나고서 남쪽으로 떠나는 고봉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어제는 뵙고 싶은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길에 먼저 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황이 삼가 말씀드렸습니다."
후에 퇴계는 고봉에게 자신의 아버지인 찬성공의 묘갈명(墓碣名)을 써주기를 부탁했고
고봉의 나이 44세 때 퇴계가 죽자 고봉은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하면서
그의 묘앞에 묘갈명을 써서 바쳤다.
오늘날 퇴계의 묘앞에 있는 묘비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어야하는가를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안동에 살았던 퇴계와 광주에 살았던 고봉의 아름다운 관계는
소아병적인 지역주의에 사로잡힌 영호남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월봉서원 오른쪽에 있는 고봉 기대승의 신도비들
빙월당 뒤 계단 위에 있는 정안문
정안문 안에 있는 숭덕사
崇德祠는 고봉 기대승 선생을 배향한 월봉서원의 祠宇이다.
월봉서원 가장 윗쪽에 자리잡고 있다.
월봉서원 왼쪽에 집이 한채가 있고
그 집앞을 지나서 월봉서원을 끼고 울창한 송림사이의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먼저 고봉의 아들인 함재의 묘소와
그 위로 고봉의 묘소가 나온다. 두 곳 모두 부인과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사진의 비석에 군기사검정과 함재 奇公이라는 단어로 보아 고봉의 아들 함재의 묘소이다.
함재의 묘소에서 송림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월봉서원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묘소가는 송림사이의 멋진 오솔길.
옆에 있는 계곡에서 졸졸졸졸 소리내며 흐르는 물소리가 청량하게 느껴진다.
오솔길가면서 담장너머로 보이는 빙월당.
월봉서원을 답사하고 다시 마을로 내려오면
고봉학술원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고봉학술원이 바로 고봉의 13대손인 기세훈(1914~현재)박사의 고택이다.
이곳 너브실마을(광곡마을)은
너브실 50여 가구 중 몇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씨인 기씨집성마을이다.
그중에서도 기세훈고택은 이 마을의 중심이다.
애일당(愛日堂)이라 불리우는 이 집은
고봉의 6대손인 기언복이 숙종 때 처음 터를 잡은 이래
3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고봉의 사상을 연구하는 고봉학술원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이 집은 300년의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전통과
멋진 자연이 조화를 이룬 집이었다.
이 집의 자연의 정취는 대숲에서 나온다.
그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유현(幽玄)하다고나 할까...
전체 대지 3500평 가운데 사랑채 뒷쪽 700평이 대숲으로 조성되어 있어
청정한 느낌과 함께 그윽한 분위기가 고택의 정취를 한껏 높여준다.
고봉학술원의 돌담길을 따라가다보면
칠송정이 나오는데 이 정자의 주인은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 기효회(涵齋 奇孝會)이다.
함재는 부친의 뜻을 좆아 벼슬길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며 평생을 지낸 조선의 큰 선비였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적하였고
의곡(義穀) 3000석을 수집하여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수송하기도 하였다.
이에 선조임금은 군기사검정(軍器寺劍正)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이곳에 내려와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칠송정이란 정자명은 의병으로 참여했던 함재선생의 활동에 감탄한 선조임금이
'천리길을 멀다않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충의가 참으로 가상하다'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함재선생이 이곳에 일곱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았다는
뜻으로 칠송정(七松亭)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곱그루의 소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칠송정은 원래 함재 선생이 선친(고봉 기대승)의 묘소 아래
3년 시묘살이를 하던 장소로 이 곳에 정자를 세운 것이다.(1587년)
일반적으로는 칠송정의 건립연대가 불확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기씨종중에서 발간한 책자에는 1587년이라고 나와있어
이 연대를 기록한다.
고봉학술원 돌담길을 따라 송림과 대숲길이 번갈아 그늘을 드리워주고 있어
느긋한 마음으로 그 옛날 대쪽같은 고봉 기대승 선생,
그리고 고봉과 퇴계의 아름다운 만남을 되새기며
산책하는 것으로 월봉서원 답사를 마쳤다.
2008년 9월 8일 오 영 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