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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은 벼 개발해 죄송합니다” 꿈의 품종 ‘호품’ 개발… 국립식량

기영석 2010. 8. 26. 22:21

“너무 좋은 벼 개발해 죄송합니다” 꿈의 품종 ‘호품’ 개발… 국립식량과학원 김보경 연구관

국민일보 | 입력 2010.08.26 18:05 | 누가 봤을까? 40대 남성, 전라

호품이란 벼가 있다. 한반도 곡창인 전남북과 충남 평야에서 올해 선풍을 일으킨 신품종이다. 밥맛과 고수확은 정반대 과녁이다. 밥맛이 좋으면 소출이 적고, 알곡이 많으면 밥맛이 떨어진다. 호품은 꿈의 품종이었다. 일본미를 가뿐히 제친 일품 밥맛에 수확량도 많았다. 게다가 키가 작아 비바람에 강했다.

농가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개발 단계에서 입소문이 퍼지더니 종자 보급 3년째인 올해 재배면적 전국 1위로 올라섰다. 2005년 1위 품종이었던 동진1호의 17년 예상 경제적 효과는 1조2000억원대로 추산된다. 현재 추세라면 호품은 동진1호 효과를 쉽게 넘길 태세다. 개발비 3억6000만원에, 1조2000억원대의 경제성이 보장된 신품종. 그건 대단한 성공이었다.

호품 개발자인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 김보경(50·벼고품질품종육종실장) 연구관은 "2006년 호품이 완성됐을 때가 벼 개발에 보낸 23년 중 가장 가슴 설레고 뿌듯한 순간이었다. 앞으로도 애쓰겠지만 내가 과연 호품보다 더 좋은 벼를 개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기록적 대풍이 이어지고 대북 식량 지원까지 중단되면서 쌀 재고가 140만t을 넘어섰다. 풍년이 시름인 시대. 판로를 찾는 농가도, 창고가 차버린 농협도, 해결책을 내놓아야 하는 정부도 가을 수확기를 앞두고 걱정은 커져만 간다. 생애 최고 품종을 내놓고 뿌듯했던 김 연구관은 더불어 당혹스러워졌다. 호품의 너무 많은 수확량이 시빗거리가 된 탓이다.

호품을 연구하며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벼를 두고 변명해야 하는 상황까지 예상한 건 아니다. 성공해서 미안한 처지가 된 김 연구관을 23일 전북 익산에 있는 국립식량과학원 실험용 논에서 만났다.

호품을 위한 변명

올해 호품은 남부지방 벼 농가를 평정했다. 지난해 8만2000㏊이던 호품 논은 올해 14만㏊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충남과 전북에서 1위, 전남에서는 2위에 올랐다. 성공은 일찍이 예견됐다. 신품종 개발 후 보급종자가 생산되기까지는 3년이 걸린다. 2006년 개발된 호품은 시험재배 단계부터 농민들 사이에서 '물건'으로 기대가 높았다. 결국 국립종자원은 보급종을 2년만인 2008년 생산했다.

호품이 놀랄 만한 수확량을 기록한 지난해 가을. 일이 꼬였다는 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개발자가 예상한 호품 수확량은 10㏊당 600㎏이었다. 비료 양을 지켰을 때의 평균치다. 벼는 비료를 많이 주면 수확이 많아지는 대신 잘 쓰러진다. 밥맛도 떨어진다. 영양과잉의 비만환자가 허약한 것과 같은 이치다. 호품은 비료를 많이 줘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건 분명 장점이지만 표준농법을 지키지 않는 풍토에서는 독이 됐다. 질 대신 양을 택한 농민들은 질소비료를 들이부었다. 지난해 일부 농가에서 호품은 10㏊당 750∼800㎏의 소출을 냈다. 기존 품종(550∼560㎏)보다 40% 정도 많은 양이다. 물론 질은 떨어졌다.

순식간에 호품은 쌀 공급 과잉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정부는 2011년 호품의 종자공급량을 조절하겠다고 최근 발표했다. 농민들이 원한다고 종자를 다 주지는 않겠다는 얘기다. 정치권의 자료 요구도 시작됐다. 국정감사철이 다가오면 국회의 질의는 폭주할 터였다.

김 연구관은 호품에 대한 오해가 답답했다. "만약 호품에 진짜 문제가 있고, 우리가 품질을 과대포장하고 선전했다면 그건 잘못이겠죠. 하지만 아닙니다. 호품은 표준재배법에 따라 재배하면 최고품종의 벼예요. 농가에서 욕심을 부려 호품벼를 호품벼답게 생산하지 못한 겁니다. 또 지난해 유례없는 풍년(491만6000t)은 호품 때문이 아니라 기후 요인이 가장 컸습니다."

호품의 밥맛은 이미 지난해 최상급으로 공인받았다. 전남 해남 시식회에서 일본 쌀 히토메보레를 누르고 1위를 했다. 농림수산식품부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가 선정한 고품질 브랜드 쌀 12종에 포함됐다. 12종 가운데 종합평가에서는 2위였지만 밥맛에서는 1등이었다. 벼 국가목록등재품종 중 최고 품질 벼 7종 가운데 하나로도 등재됐다. 지난 60년간 개발된 벼 180여종 가운데 상위 7위에 속한 것이다. 질은 낮고 양만 많다면 시대착오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질 좋고, 양도 많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개발자 항변에는 이유가 있었다. 보고서 쓰는 농부

김 연구관의 얼굴은 천상 농부마냥 까맸다. 최근 몇 년 관리업무가 많아지면서 하얘졌다는 얼굴색이 그랬다. 농부보다 들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서 농부가 아니라고 우길 이유도 없었다.

그는 "출근해서 논에 나갔다가 점심 먹고 또 논에 나간다. 실험용 논에 머무는 시간이 사무실의 4배쯤이다. 고생이야 말로 못한다"고 했다. 농한기인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평가 분석 보고의 계절이다. 벼 개발자란 그러니까 '실험하고 보고서 쓰고 회의까지 하는 농부'라고 보면 된다.

이삭이 나오는 요즘, 개발자의 일이란 땡볕 아래 논둑에 서서 남들 눈에는 똑같아 보이는 벼들을 종일 바라보는 것이다. 종자 따라, 재배법 따라, 비 바람 기온에 따라 어떤 벼가 어떻게 자라고 이삭이 어떻게 익는지 살피고 기록해서 최고 품종과 최적의 재배조건을 찾아내야 한다.

연구관 1인에게 할당된 논은 2㏊(약 6000평) 정도다. 각자 담당 논의 벼 4000∼5000개를 1주일에 2∼3회 관찰한다. 논을 한 바퀴 도는 데 2∼3일이 걸리니 결국 벼 보기는 매일 하는 일이다. 그래서 벼 육종 전문가에게 일생 여름휴가란 없다. 그는 "벼한테 휴가 다녀올 테니 쉬었다가 자라자,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우리가 놓치면 그게 다 농가 피해"라고 했다.

벼의 차이를 잡아내려면 적어도 12∼13년 관록은 필요하다. 김 연구관은 "나 정도 되면 1시간에 벼 몇 백 개를 볼 수 있지만 초심자는 몇 십 개 보기도 버겁다"고 했다. 벼 품종 하나가 탄생하기까지는 보통 11∼12년이 걸린다. 벼 개발에도, 전문가 양성에도 관건은 시간이었다.

벼 개발자들은 모내기 시즌에 가장 긴장한다. 한 가지 종자를 뿌리는 농가와 달리 실험용 논에는 유전 특질이 다른 수만 개의 모종을 정해진 자리에 심어야 한다. 행여 위치가 달라지면 수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한번 자리가 바뀌면 벼의 내력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심증이 있어도 물증이 없으니까 다 버려야 해요. 그리고 예전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요.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호품 역시 그렇게 폭염 속에 고생해가며 탄생했다. "호품 개발을 후회하진 않아요. 후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일을 한 적도 없고. 만약 호품이 4∼5년 뒤에 나왔으면 모두에게 박수 받았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있는 거죠. 부분적으로는 부작용을 인정합니다. 농민들도 준비가 안 된, 이런 공급 과잉 시기에 호품으로 문제를 만들었으니까. 연구가 시대보다 너무 빨랐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해요."

'질의 시대' 멀지 않았다

김 연구관은 1987년 작물시험장(국립식량과학원의 전신)에 입사한 이래 벼에만 매달려왔다. 그간 개발한 벼가 64종이다. 주개발자로 7종, 공동개발자로 57종을 만들었다. 개중에는 남평벼(2001∼2004년 재배면적 1위)와 동진1호, 신동진 같은 히트작도 있었다. 대박이 난다 한들, 공무원에게 보상은 없었다. 동진1호로 2006년 국립종자원의 '대한민국 우수품종상'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을 때도 상금은 500만원이었다.

공로는 사라지고 공격만 받는 상황이 속상할 법했다. "시간이 걸릴 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비료량을 지키지 않고 수확만 늘리려고 하는 농부들은 도태될 거예요. 5년만 지나면 모든 게 제자리를 잡을 거라 믿습니다. 호품도 제 평가를 받을 거고요. 벼 개발자는 10∼20년 후를 내다보고 일합니다. 요즘은 의약품과 건강식품 역할을 하는 쌀 같은 기능성 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의 핵심이 품질등급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쌀 수매는 대부분 품질과 무관하게 양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농민들이 호품을 '밥맛 좋은 600㎏'짜리 대신 '질 낮은 800㎏'으로 전락시킨 이유가 그것이다. 질 높은 쌀이 제값을 못 받는 상황에서 재배법 지켜가며 고품질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쌀 품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인프라도 갖춰지지 않았다.

김 연구관은 "미곡종합처리장(RPC)에는 밥맛을 결정하는 단백질 함량을 분석할 기기도, 완전미(백미 상태에서 흠이 없는 쌀) 비율을 확인할 장비도 없다"며 "기계를 들여놓고 고품질을 보상하면 농민들도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는 "그건 품종 개발자의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질문을 바꿨다. 남아도는 벼 대신 다른 작물을 심는 건 왜 그렇게 어려울까?

"벼 말고 다른 밭작물을 심어서는 벼만큼 소득을 낼 수가 없어요. 논콩도, 옥수수도 마찬가지예요. 사료용 벼를 심는다 해도 소득이 쌀밥용 벼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도 보조금 줘서 작물전환을 해보자,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의견을 모으면 (전문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해주겠다는 겁니다. 힘들어도 해야 할 일입니다."

익산=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