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현재 대원과학대학 학장이신 기주연(奇周衍) 박사(국문학)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행주(幸州) 기씨(奇氏)는 3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단일 본(本)의 성(姓)으로 전국에 약 2만명여명이 분포되어 살고 있다. 성씨별 인구수는 80위로 인구수는 많지 않은 귀성(貴姓)에 속한다.
득성(得姓) 시조(始組)는 기우성(奇友誠)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인 기자(箕子:文聖王)의 48대 왕자이면서 마한왕(馬韓王)인 기준(箕準 : 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으로 燕나라 衞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의 시조가 됨)의 7세손인 기훈(기훈:마한원왕)의 세 아들 가운데 맏이다. 아우 우량(友諒)은 청주(淸州) 한씨(韓氏)의 시조가 되고 막내인 우평(友平)은 선우씨(鮮于氏)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기씨와 한씨와 선우씨는 종씨(宗氏)로서 도의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기씨는 우성(友誠)으로부터 후대의 계보를 잃어 고려 인종(仁宗)때의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 정2품 벼슬)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一世)로 세계(世系)를 헤아린다. 그에 앞서 고려 개국공신에 기언(奇彦)이란 이름도 나오나 계대(系代)는 못하는 형편이다,
행주 기씨가 특히 융성을 누리기는 고려 중엽 이후의 약 200년간으로 순우(純祐)의 손자 윤위(允偉:대장군), 윤숙(允肅:대장군)이 고종(高宗)때 무인(武人)으로 그 이름을 떨쳤고 탁성(卓誠:부원수)은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평정군으로 참전하고 뒷날 의종(毅宗)의 무신(武臣)천대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에 가담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벼슬)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홍수(洪壽)가 최충헌(崔忠獻)에 협력하여 역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는 등 융성가도를 달리던 기씨의 영화는 고려말 기자오(奇子敖)의 딸(順女)이 원나라 궁녀로 뽑혀 갔다가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1320-1370 : 명나라 태조 朱元璋에게 나라를 빼앗김)의 두번째 부인으로 황후(皇后)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윤숙(允肅)의 현손녀(玄孫女)인 기황후(奇皇后)는 8세전후의 어린 나이로 원나라의 궁궐에 들어가 뛰어난 미모와 재치로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22세에 아들을 낳아 정식으로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은 원조(元祖)의 대통을 이어 몽고의 왕(소종,昭宗)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동아시아계를 지배하던 원실(元室)의 처가가 된 기씨는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고 기황후의 아버지는 물론, 기황후의 조부와 증조부까지 모두 왕으로 추존(追尊)되고 오빠 기철(奇轍)과 기원(奇轅)은 고려 조정을 쥐고 흔드는 실력자로 등장하여 이른바 기씨 천하가 되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듯이 기씨세력의 원천이었던 원(元)나라는 이미 국운이 기운 뒤였다. 1351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였고 왕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중국본토를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수복해 가는 대륙의 풍운을 기회로 포착하여 1백여년의 원나라로부터의 속박을 끊어내는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원나라가 점령한 옛 땅이 수복되고 몽고풍은 점차 추방되며 전통문화가 부활되고 장려되었다. 역사 대전황의 태풍으로 기씨네의 영화 또한 뿌리채 날아가게 된 것이다. 외족의 앞잡이로 지목된 기씨 일가는 민족 반역자로 몰려 멸문(滅門)의 지경의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역사의 죄인으로 매몰된 기씨 문중을 다시 살려내 조전조에 오히려 명문(名門)의 영예를 얻게 한 중흥조(中興朝)는 기건(奇虔:시호는 貞武公)이다. 기건은 세종때 초야에 묻힌 선비였으나 세종은 그의 학덕을 듣고 발탁해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벼슬)에 임명하였다. 기건은 대사헌을 거쳐 벼슬이 판충추부사(判中樞府事: 왕명의 출납, 병기, 군정, 숙위등의 일을 맡아보던 중추부의 으뜸벼슬로 종1품벼슬)로 청백리(청백리)로도 뽑혔다. 단종이 임금이 되고 수양대군이 궁중에 무상출입하여 정치에 간여하자 이는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종실(宗室)의 궁내 출입을 통제할 것을 상소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쿠테타를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수양은 그의 인품과 명망을 아껴 직접 삼고초려(三苦草慮)의 자세로 세차례나 찾아가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눈이 먼 것으로 가장하고 응하지 않자 세번째는 바늘로 눈을 찌르는 척해 시험했으나 꼼짝도 않고 이겨내자 돌아갔다고 할 만큼 지조가 강인한 분이었다. 기건(奇虔)의 아호(雅號)는 청파(靑坡)로 현재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은 그가 처하였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의 증손(曾孫)이 기묘사화(己卯士禍:중종14년,1519년에 훈구파가 이상정치를 주장하던 신진 사류를 죽이거나 유배시킨 사건)에 화를 입은 기묘명신(奇卯名臣) 팔현(八賢:조강조, 기준, 김식, 한충, 김구, 김정, 김안국, 김정국) 중 한사람인 기준(奇遵:자는 敬仲이며 호는 服齊 또는 德陽,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修撰, 侍講官, 應敎등을 역임함.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穩城에 유배되어 교살됨)이다, 고려말 멸문을 피해 흩어졌던 기씨들은 이 무렵 기묘사화를 피해 별리 남도(南道)로 낙향, 전남을 중심한 일대가 오히려 기씨네 본 고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씨 중 송도(松都) 이남은 다 정무공(貞武公)의 후예이고 송도 이북은 정무공의 숙조(叔組)의 지파로서 도덕문장과 사직의 절의등은 면면히 계승돠여 그 수는 많지 않으나 행주기씨는 청아한 씨족으로 번영하여 내려오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기씨의 명성을 천하에 드러낸 이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는 明彦, 호는 高峰, 시호는 文憲公)이다. 기건의 현손(玄孫)이며 기준의 조카인 고봉은 일찍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명종(明宗)때(1558년) 사마양시(司馬兩試)로 대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 정3품 당상관 벼슬), 대사겸(大司謙:사간원의 으뜸벼슬, 정3품)을 역임하였다. 퇴계 이황과 8년에 결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왕복 서신논쟁은 조선학술사의 가장 빛나는 한 대목이며 퇴계는 고봉의 탁견을 상당부분 수용하였다.
벼슬에서는 광해조 영의정에 이른 기자헌(奇自獻:1562-1624, 호는 晩全, 21세에 사마양시로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아 선조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에 이름)이 행주기씨를 대표한다. 만전은 선조(先組)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할 때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을 즉위시키는데 공헌하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할 때 또한 부당함을 역설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하려 할 때도 적극 반대하였다.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제학,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할 때에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귀향가고 이괄(李括)의 난때 무고한 혐의를 받아 사사되었다.
고봉을 배출하고 조선조 성리학의 학맥을 형성한 기씨네는 조선말 다시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 자는 大中, 저서에 納凉私議, 蘆沙集등)을 배출하였다. 노사의 학통은 손자 기우만(奇宇萬)에 이어졌다. 그는 고종18년에 조정에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으며 일본군의 침략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일본군과 싸워 행동하는 지성으로의 수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기삼연(奇參衍)은 조선 말기 의병을 모집하여 전남 장성, 부안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는 등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고 기산도(奇山度, 1869-?)는 대한제국때 박인호(朴寅浩)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국원회복에 힘썼으며 을사조약의 오적의 하나인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려다 실패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국난기에 기씨네 문중의 충의 전통은 빛난다. 기씨 문중의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총 22명에 이른다.
행주(幸州) 기씨(奇氏)는 3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단일 본(本)의 성(姓)으로 전국에 약 2만명여명이 분포되어 살고 있다. 성씨별 인구수는 80위로 인구수는 많지 않은 귀성(貴姓)에 속한다.
득성(得姓) 시조(始組)는 기우성(奇友誠)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인 기자(箕子:文聖王)의 48대 왕자이면서 마한왕(馬韓王)인 기준(箕準 : 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으로 燕나라 衞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내려와 마한의 시조가 됨)의 7세손인 기훈(기훈:마한원왕)의 세 아들 가운데 맏이다. 아우 우량(友諒)은 청주(淸州) 한씨(韓氏)의 시조가 되고 막내인 우평(友平)은 선우씨(鮮于氏)의 조상이 되었다. 따라서 기씨와 한씨와 선우씨는 종씨(宗氏)로서 도의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서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 기씨는 우성(友誠)으로부터 후대의 계보를 잃어 고려 인종(仁宗)때의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 : 정2품 벼슬)를 지낸 기순우(奇純祐)를 1세(一世)로 세계(世系)를 헤아린다. 그에 앞서 고려 개국공신에 기언(奇彦)이란 이름도 나오나 계대(系代)는 못하는 형편이다,
행주 기씨가 특히 융성을 누리기는 고려 중엽 이후의 약 200년간으로 순우(純祐)의 손자 윤위(允偉:대장군), 윤숙(允肅:대장군)이 고종(高宗)때 무인(武人)으로 그 이름을 떨쳤고 탁성(卓誠:부원수)은 조위총(趙位寵)의 난에 평정군으로 참전하고 뒷날 의종(毅宗)의 무신(武臣)천대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킨 정중부(鄭仲夫)의 난(亂)에 가담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 벼슬)를 거쳐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
홍수(洪壽)가 최충헌(崔忠獻)에 협력하여 역시 평장사(平章事)에 오르는 등 융성가도를 달리던 기씨의 영화는 고려말 기자오(奇子敖)의 딸(順女)이 원나라 궁녀로 뽑혀 갔다가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 1320-1370 : 명나라 태조 朱元璋에게 나라를 빼앗김)의 두번째 부인으로 황후(皇后)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윤숙(允肅)의 현손녀(玄孫女)인 기황후(奇皇后)는 8세전후의 어린 나이로 원나라의 궁궐에 들어가 뛰어난 미모와 재치로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22세에 아들을 낳아 정식으로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은 원조(元祖)의 대통을 이어 몽고의 왕(소종,昭宗)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동아시아계를 지배하던 원실(元室)의 처가가 된 기씨는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고 기황후의 아버지는 물론, 기황후의 조부와 증조부까지 모두 왕으로 추존(追尊)되고 오빠 기철(奇轍)과 기원(奇轅)은 고려 조정을 쥐고 흔드는 실력자로 등장하여 이른바 기씨 천하가 되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듯이 기씨세력의 원천이었던 원(元)나라는 이미 국운이 기운 뒤였다. 1351년 고려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였고 왕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중국본토를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수복해 가는 대륙의 풍운을 기회로 포착하여 1백여년의 원나라로부터의 속박을 끊어내는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원나라가 점령한 옛 땅이 수복되고 몽고풍은 점차 추방되며 전통문화가 부활되고 장려되었다. 역사 대전황의 태풍으로 기씨네의 영화 또한 뿌리채 날아가게 된 것이다. 외족의 앞잡이로 지목된 기씨 일가는 민족 반역자로 몰려 멸문(滅門)의 지경의 보복을 당하게 되었다.
역사의 죄인으로 매몰된 기씨 문중을 다시 살려내 조전조에 오히려 명문(名門)의 영예를 얻게 한 중흥조(中興朝)는 기건(奇虔:시호는 貞武公)이다. 기건은 세종때 초야에 묻힌 선비였으나 세종은 그의 학덕을 듣고 발탁해 지평(持平:사헌부의 정5품 벼슬)에 임명하였다. 기건은 대사헌을 거쳐 벼슬이 판충추부사(判中樞府事: 왕명의 출납, 병기, 군정, 숙위등의 일을 맡아보던 중추부의 으뜸벼슬로 종1품벼슬)로 청백리(청백리)로도 뽑혔다. 단종이 임금이 되고 수양대군이 궁중에 무상출입하여 정치에 간여하자 이는 정치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종실(宗室)의 궁내 출입을 통제할 것을 상소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쿠테타를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수양은 그의 인품과 명망을 아껴 직접 삼고초려(三苦草慮)의 자세로 세차례나 찾아가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눈이 먼 것으로 가장하고 응하지 않자 세번째는 바늘로 눈을 찌르는 척해 시험했으나 꼼짝도 않고 이겨내자 돌아갔다고 할 만큼 지조가 강인한 분이었다. 기건(奇虔)의 아호(雅號)는 청파(靑坡)로 현재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은 그가 처하였던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의 증손(曾孫)이 기묘사화(己卯士禍:중종14년,1519년에 훈구파가 이상정치를 주장하던 신진 사류를 죽이거나 유배시킨 사건)에 화를 입은 기묘명신(奇卯名臣) 팔현(八賢:조강조, 기준, 김식, 한충, 김구, 김정, 김안국, 김정국) 중 한사람인 기준(奇遵:자는 敬仲이며 호는 服齊 또는 德陽,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修撰, 侍講官, 應敎등을 역임함.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穩城에 유배되어 교살됨)이다, 고려말 멸문을 피해 흩어졌던 기씨들은 이 무렵 기묘사화를 피해 별리 남도(南道)로 낙향, 전남을 중심한 일대가 오히려 기씨네 본 고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씨 중 송도(松都) 이남은 다 정무공(貞武公)의 후예이고 송도 이북은 정무공의 숙조(叔組)의 지파로서 도덕문장과 사직의 절의등은 면면히 계승돠여 그 수는 많지 않으나 행주기씨는 청아한 씨족으로 번영하여 내려오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기씨의 명성을 천하에 드러낸 이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자는 明彦, 호는 高峰, 시호는 文憲公)이다. 기건의 현손(玄孫)이며 기준의 조카인 고봉은 일찍이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명종(明宗)때(1558년) 사마양시(司馬兩試)로 대과에 올라 부제학(副提學:홍문관에 둔 정3품 당상관 벼슬), 대사겸(大司謙:사간원의 으뜸벼슬, 정3품)을 역임하였다. 퇴계 이황과 8년에 결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왕복 서신논쟁은 조선학술사의 가장 빛나는 한 대목이며 퇴계는 고봉의 탁견을 상당부분 수용하였다.
벼슬에서는 광해조 영의정에 이른 기자헌(奇自獻:1562-1624, 호는 晩全, 21세에 사마양시로 29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아 선조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에 이름)이 행주기씨를 대표한다. 만전은 선조(先組)가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할 때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을 즉위시키는데 공헌하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할 때 또한 부당함을 역설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하려 할 때도 적극 반대하였다.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제학, 대사헌을 거쳐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해할 때에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귀향가고 이괄(李括)의 난때 무고한 혐의를 받아 사사되었다.
고봉을 배출하고 조선조 성리학의 학맥을 형성한 기씨네는 조선말 다시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로 일컬어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 자는 大中, 저서에 納凉私議, 蘆沙集등)을 배출하였다. 노사의 학통은 손자 기우만(奇宇萬)에 이어졌다. 그는 고종18년에 조정에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라 불리었으며 일본군의 침략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일본군과 싸워 행동하는 지성으로의 수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기삼연(奇參衍)은 조선 말기 의병을 모집하여 전남 장성, 부안 등지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는 등 의병장으로서 활약하였고 기산도(奇山度, 1869-?)는 대한제국때 박인호(朴寅浩)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여 국원회복에 힘썼으며 을사조약의 오적의 하나인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려다 실패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국난기에 기씨네 문중의 충의 전통은 빛난다. 기씨 문중의 조선조 문과 급제자는 총 22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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