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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인가 괴물인가

기영석 2009. 2. 23. 22:36

맹수인가 괴물인가

한겨레 | 기사입력 2008.12.06 11:41 | 최종수정 2008.12.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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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대중문화의 환상이 탄생시킨 '동물원 동물' 라이거, 이제는 철 지난 유행처럼 외면받아

절반은 사자이고 절반은 호랑이인 동물. 라이거는 정확히 그러하다.

라이거는 호랑이의 줄무늬와 사자의 갈기를 가졌다. 사자처럼 포효해 용맹을 과시하고, 호랑이처럼 '크르륵'거리며 반가움을 표시한다. 라이거는 시속 70㎞ 이상으로 뛰는 육상 선수이자 호랑이 못지않은 수영 선수다. 그리고 사자, 호랑이를 넘어서는 고양잇과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지상 최대의 맹수이지만 라이거는 후손을 생산하지 못한다. 마치 당나귀와 말의 잡종인 노새가 유전학적인 결함으로 새끼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평균 15년을 사는 사자·호랑이보다 2~3년 정도 수명이 짧다. 야생·반려·농장 동물 등 기존의 동물 분류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라이거는 '동물원 동물'이다. 오직 동물원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잡종 동물이기 때문이다.

서커스단에서 맹수 쇼를 위해 잡종 교배

라이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세기 초반 프랑스의 동물학자 에티엔 제프루아 생틸레르가 그린 새끼 두 마리의 그림(위)으로 알려졌다. 이즈음은 유럽 제국의 동물 상인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맹수들을 사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리고 동물원과 서커스단에서는 '맹수 쇼'를 위해 호랑이와 사자를 잡종 교배했다. 근대 최대 동물원인 독일의 하겐바크 동물원도 라이거를 만들었다. 라이거 열풍은 20세기 중반까지 계속됐다. 라이거는 사자와 호랑이를 합친 강자 중의 강자, 꿈의 동물, 유전학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라이거 샤스타는 대중문화 속 스타 동물의 효시로 여겨진다. 암컷인 샤스타는 1948년 솔트레이크시티의 동물원에서 태어나 무려 24년을 살며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72년 샤스타가 죽자, 샤스타는 박제로 제작돼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다. 미국 위스콘신주 밸리오브킹스 동물원의 누크도 21살까지 장수하며 인기 스타로 군림했다.

라이거가 동물원에만 존재하는 이유는, 사자와 호랑이는 야생에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자는 아프리카에서 살고, 호랑이는 아시아에서 산다. 하지만 라이거의 야생 존재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페르시아사자의 아종인 아시아사자가 지금도 인도 구자라트주 기르국립공원에서 살고 있음을 든다. 이 지역의 사자는 아시아의 유일한 사자다.

지금은 300마리밖에 남지 않았지만, 과거 페르시아사자는 지중해에서 서남아시아 전역까지 분포했다. 이집트는 물론 그리스, 파키스탄과 인도의 비하르 지방까지 뻗어 나갔다.(인도·그리스 문화에서 사자가 흔히 등장함을 떠올려보라) 호랑이도 흔했다. 호랑이는 지금 인도 남부와 시베리아 아무르 지방에 살지만 예전에는 인도 서부에서 한반도까지 아시아 전체를 호령했다. 라이거 '헤라클레스'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희귀멸종위기종센터(TIGERS)는 싱가포르 설화에 나온 사자가 라이거일 수 있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내놓는다.

"14세기 스리비자얀의 왕자가 싱가포르 섬에 도착한다. 여기서 그는 흰 갈기를 지닌 동물을 보았는데, 그것은 사자도 아니었고 호랑이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자로 생각해 이 섬을 사자(singa)의 도시(pura) '싱가푸라'로 이름 지었다."

600년 전 싱가푸라 섬을 지키던 사자는 혹시 라이거가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동물학자들은 이런 가능성에 손사래를 친다. 호랑이는 물가에 살며 단독 생활을 즐기는 반면, 사자는 사막과 같은 환경에서 집단생활을 한다. 서식지가 겹치더라도 판이한 환경과 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섞여 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자·호랑이의 개체 수가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과거라면, 라이거의 탄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요즈음 태어나는 라이거의 대부분이 예전처럼 인공교배되는 것이 아니라 사파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눈이 맞아 태어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룡이는 사자 집단에서 좀 왕따와 비슷했죠. 사자는 서열 싸움에서 이긴 수컷이 암컷 대다수를 거느리거든요. 서열 하위인 사룡이가 집단에서 밀려나면서 호랑이 명랑이에 연정을 품었을지도 모르죠."(에버랜드 고영준 동물운영팀 과장)

동물보호단체들, 라이거 사육은 "괴물 쇼"

사룡과 명랑은 각각 1990년, 1991년생으로 인공포육 시기에 함께 놀던 사이였다. 어렸을 적 우정이 나중에 사랑으로 발전한 밑바탕이 됐을 수도 있다(에버랜드는 성 성숙이 이뤄지기 이전인 새끼일 때 사자와 호랑이를 함께 놀게 한다). 막내 라이거 크리스도 어렸을 적 함께 자란 또래 사자와 호랑이하고는 큰 싸움 없이 친하게 지낸다.

미국 동물원·수족관 협회는 인위적인 잡종 번식을 비윤리적으로 본다. 다만 예기치 않은 사고나 비의도적인 번식은 예외로 인정한다. 미국의 동물보호단체인 빅캣레스큐는 동물원에서 라이거를 키우는 것 자체를 "괴물 쇼와 같은 것"이라며 반대한다. 어쨌든 라이거의 탄생을 반갑게 맞는 동물원은 점점 줄어든다. 한 시대가 지났기 때문이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한국 라이거 가계도 |
3세대 나올 가능성은 희박


한국 라이거는 1세대와 2세대로 구분된다. 1세대는 사자 용식이와 호랑이 호영이가, 2세대는 사자 사룡이와 호랑이 명랑이가 낳았다.

1989년 한국 최초의 라이거 대호·용호·야호를 만든 용식-호영 커플은 이듬해 3월 라빈·라민을 탄생시킨다. 라빈과 라민은 교류 차원으로 부산 성지곡동물원에 입양됐다. 철창 안에 전시된 라민과 라민은 열악한 시설로 동물원이 문을 닫은 뒤, 다시 2005년 고향 에버랜드로 돌아왔고 지난해 숨졌다.

2세대의 첫 라이거는 라피도다. 사자 사룡이와 호랑이 명랑이는 1997년 라피도를 낳은 이후 6마리를 더 낳았다. 특히 사룡이는 호랑이를 탐한 '변강쇠'로 불렸다. 2000년 사룡이는 명랑이가 라거·미거·시거를 임신한 사이 호랑이 명이와 '바람'을 피워 동글이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사룡이가 일으킨 라이거 대번식은 그다지 동물원에 매력적이진 않았다. 라거·미거·시거·동글이(2000년 출생)와 로미(2001년 출생)는 2001년 8월 중국 하얼빈 동물원으로 입양됐다. 더는 라이거의 스타성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사룡-명랑 커플은 2002년 마지막으로 크리스를 출생시키고 세상을 떴다. 이로써 에버랜드 동물원에는 라피도와 크리스만 남았으며, 라피도와 크리스는 지난 10월까지 야간사파리에 전시됐다.

남종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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