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幸州奇氏-◆

선세업적

기영석 2010. 12. 22. 21:17

우성(友誠)
득성시조(得姓始祖). 기원전 30년경에 사신분.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의 아들로 태어나 비로소 기씨(奇氏)로 성(姓)을 얻고 행주(幸州)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后孫)들은 행주(幸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왔다, 벼슬은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때에 시중(侍中)이었다.[만성보(萬姓譜), 명신록(名臣錄), 세보(世譜)]

언(彦)
936년경에 사신분. 언(彦)은 언(言)의 뜻이다. 장군(將軍)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일리천(一利川)에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과 대진(對陣)할 때 공(公)에게는 군사 3만을 주어 좌익(左翼)을 맡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에는 기록없음]

정업(貞業)
998년경에 사신분. 고려(高麗) 목종(穆宗) 때의 명의(名醫)로 전의(典醫)가 되었으며 목종(穆宗)이 병이 났을 때에는 왕사(王師)인 승려 두 명과 같이 밤낮으로 간호(看護) 시약(施藥)을 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는 기록없음]

순우(純祐)
1세. 1123년경에 사신분. 중시조(中始祖). 문유(文儒)의 아들이요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守太師) 수전(守全)의 아버지이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세보(世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수전(守全)
2세. 1160년경에 사신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순우(純祐)의 아들이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아버지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고조(高祖)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양현(歐陽玄)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비(碑)에는 추밀부사(樞密副使)라고 하였다.[세보(世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윤위(允偉)
3세. 1217년경에 사신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아들이요,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형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상장군(上將軍)이다. 1211년(희종 7) 왕이 근신 왕준명 우승경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죽이려 할 때 당시 지유로서 신선주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구출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다. 1217 고종4년 이장대(李將大), 이당필(李唐必) 등이 반란한 잔당을 본령군(本領軍)과 신기(神騎) 2반을 거느리고 이를 소탕했고 이어서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장군으로 개경시가에 군사를 배치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거란(契丹)이 고주(高州 :함남 고원)와 화주(和州 ;함남 영흥)에 침입할때는 대장군으로, 가발병마사(加發兵馬使)가 되어 출정하여 격퇴하였다. 그러나 군사개편으로 오군과 가발병을 폐지하고 삼군을 설치함에 따라 가발병마사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들이 없어 사위 재신(宰臣) 손정렬(孫廷烈)이 가계(家系)를 계승(繼承)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병감(東國兵鑑), 세보(世譜)]

윤숙(允肅)
3세. ?~1257 고종 44년.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둘째 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증조부(曾祖父)이며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의 고조(高祖)이며, 시호(諡號)는 강정(康靖)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판리부사(上柱國判吏部事)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글에서 공(公)이 의종(毅宗), 명종(明宗), 신종(神宗) 3대 영상(領相)으로 40년간의 영화(榮華)를 향락(享樂)하고 의종(毅宗) 말기(末期)에 권신(權臣) 정중부(鄭仲夫)가 왕을 마음대로 몰아내고, 세우고 중신(重臣)들을 함부로 주륙(誅戮)하는 작난(作亂)을 조용히 설득하여 왕정(王政)을 복귀(復歸)시킨 공(功)이 크다고 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필선(弼善)
3세. 1230년경에 사신분.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셋째 아들이요 상장군(上將軍) 겸(謙)의 아버지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세보(世譜)]

탁성(卓誠)
?~1179(명종 9년). 용모(容貌)가 미려(美麗)하고 사어(射御)와 마술(馬術)을 특히 잘하였다. 교위(校尉)가 되었을 때 말달리기와 격구(擊毬)를 즐겨하는 의종(毅宗)에게 뽑혀 견룡(牽龍:御駕牽引)이 되어 언제나 왕의 측근에서 권신들과 잘 교유(交遊)하였으며 위장군(衛將軍)으로 여러 차례 추천되어 명종(明宗) 초기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174년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 형세(形勢)가 강대(强大)할 때 부원수(副元帥)로 이를 토멸(討滅)하고 개선(凱旋)하니 그 전공(戰功)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판리부사(判吏部事)에 올랐다. 1179 명종(明宗) 9년에 마침 광평궁(廣平宮)이 오래 폐하여 주인이 없었으므로, 왕에게 청하여 광평궁에 거처하려 하였다. 부인이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고 궁에 거처하기 수개월 만에 돌아가시니 왕은 조위총을 토멸한 전공을 논(論)하여 수태사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을 추증(追贈)하고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이 되어 각상(閣上)에 형상이 그려졌다. [고려사(高麗史) 기탁성(奇卓誠) 본전(本傳),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존정(存靖)
1215년경에 사신분.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장군(將軍)이다. 1216 고종 3년에 거란의 대군이 고려의 국경선을 침범하여 영덕성(寧德城:평안북도 영변)을 넘어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驛),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하였다, 고려의 삼군(三軍)도 이곳에 이르렀으나 거란의 기세에 눌려 감히 나아가지 못할 때 공은 장군으로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와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돌파하여 거란군을 크게 물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인보(仁甫)
?~1219.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무인(武人)이다. 공(公)은 랑장(郞將)으로 원수(元帥) 조충(趙?)과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를 따라 거란의 침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막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권(政權)을 잡고 횡포(橫暴)를 부리고 그를 책망하는 백여명(百餘名)을 무단(無端) 살륙(殺戮)함으로 이에 분격(憤激)하여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발각되어 피살(被殺)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홍수(洪壽)
4세. 1148~1209. 자(字)는 태고(太古)요, 시호(諡號)는 경의(景懿)이다. 강정공(康靖公) 윤숙(允肅)의 큰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할아버지 홍영(洪穎)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명필(名筆)이자 문장(文章)에도 능(能)하였으며 고려(高麗)의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3조(朝)에 걸쳐 무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벼슬은 1194년(명종 24)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 같은해 11월에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감수국사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監修國史判兵部事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12월에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 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199년 5월에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니 이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최고(最高)의 서예작품(書藝作品)으로 평가(平價)되었다, 1204년 1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의 희종에게의 선위(禪位)를 논의하였고, 희종 때에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가야금과 시를 즐겼고 서예(書藝)로 기쁨을 삼았다. 나이 62세이고 고양읍지(高陽邑誌)에는 행주(幸州)는 공(公)의 옛터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양읍지(高陽邑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세보(世譜)]

홍영(洪穎)
4세. 1240년경 사신분.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둘째 아들이요, 삼사우사(三司右使) 관(琯)의 아버지이고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할아버지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承郎將)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공(公)의 부인은 공예왕태후(恭叡王太后)의 동생이다. 원나라에서 기황후(奇皇后)가 고귀(高貴)한 사람이 되어 왕이름은 알수 없지만 왕으로 추증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홍석(洪碩)
4세. 1240년경 사신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守太師) 윤숙(允肅)의 셋째 아들이다,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 말기(末期)인 고종(高宗) 때 지유(指諭)로 있으면서 장군 유정, 지유 민경함 등과 함께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이 죽자 최우의 외손자 김미를 최우의 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하기를 청하였다. 뒤에 김미가 최우의 서자 최항과 권력다툼을 하여 최항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유정, 민경함 등과 함께 최항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러나 1258년(고종 45) 최씨정권이 몰락함에 풀려나와 1275년(충렬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에 제수(除授)되었고 1278년에는 정동도원수 홍다구의 추천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다시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감찰제헌(監察提憲)으로 국가기무(國家機務)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광정대부(光靖大夫)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司)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

겸(謙)
4세. 1250년경에 사신분. 처음 이름은 양(亮)이다. 상장군(上將軍) 필선(弼善)의 아들이요, 판각문하사(判閣門下事) 절(節)의 아버지이다.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셨다

온(蘊)
5세. 1270년경에 사신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홍영(洪穎)의 큰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큰아버지이며 고려(高麗) 고종(高宗)의 부마(駙馬)이다. 벼슬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동지추밀사(同知樞密使)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

관(琯)
5세. 1270년경에 사신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홍영(洪穎)의 둘째 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아버지이다. 처음이름은 장(璋)이나 고려 충선왕과 이름이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응양군(鷹陽軍)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원(元)나라에서 기황후(奇皇后)가 고귀(高貴)한 사람이 되어 왕이름은 알수 없지만 왕으로 추봉(追封)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

절(節)
5세. 1270년 경에 사신분. 상장군(上將軍) 겸(謙)의 아들이요, 문하시랑(門下侍郞) 판각하사(判閣下事) 효순(孝順)의 아버지이다. 벼슬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판각문하사(判閣門下事)에 이르렀다. [세보(世譜)]

자오(子敖)
6세. 1266~1328. 자(字)는 자오(子敖)이고 시호는 장헌(莊獻)이며 삼사우사(三司右使) 관(琯)의 아들이요 대사도(大司徒) 철(轍)과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이다. 고려(高麗)에서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을 거쳐 총부산랑(摠府散郞)을 배(拜)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추증(追贈)하였고 원(元)나라에서는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으로 영안왕(榮安王)을 봉(封)하였다가 다시 경왕(敬王)으로 올려 추봉(追封)하였다. 1290 경인년(庚寅年)에 원(元)나라에서 반란한 무리인, 내안(乃顔)의 당(黨), 합단(哈丹)이 그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여 형세가 위급함에 충렬왕(忠烈王)이 왕비와 백관(百官)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란을 하였는데 중군편장(中軍偏將)으로 이를 퇴치(退治)한 공(功)이 컸다. 공(公)은 현사대부(賢士大夫)와 같이 종유(從遊)하고 재물(財物)을 몰랐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행장(行狀)을 짖고 구양현(歐陽玄)이 비문(碑文)을 지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효순(孝順)
6세. 고려 때 문하시랑판각하사(門下侍郞判閣下事)를 지냈다.

인걸(仁傑)
8세. 1356년경에 사신분. 대사도(大司徒) 철(轍)의 둘째 아들이요, 랑장(郞將) 신(愼)의 아버지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개성부윤(開城府尹)에 이르렀다. [세보(世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새(賽)
8세. 1356년경에 사신분. 몽골이름은 새인티무르(賽因帖木兒). 대사도(大司徒) 철(轍)의 넷째 아들인데 일찍이 고모인 황후(皇后)에게 가서 원(元)나라에 귀화(歸化)하여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1356년 공민왕에 의한 병진참화(丙辰慘禍)가 일어났을 때 원(元)에 있었으므로 생명(生命)을 보전(保全)하였으며 1367년 원(元)이 멸망(滅亡)하자 요양(遼陽), 심양(瀋陽)의 유민(遺民)들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근거지(根據地)로 가족(家族)의 복수(復讐)를 위해 고려(高麗)의 북쪽 경계를 위협(威脅)하다가 1370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이성계(李成桂)와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 등이 동북면(東北面)을 공격하자 패주(敗走)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동국병감(東國兵鑑), 태조실록(太祖實錄), 세보(世譜)]

전룡(田龍)
8세. 1356년경에 사신분. 덕산부원군(德山府院君) 윤(輪)의 아들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승지(承旨)며 원(元)나라에서는 한림(翰林)인데 공민왕에게 일족이 몰살할 때 원(元)나라에 망명(亡命)하였다,
강원도(江原道) 이천읍내(伊川邑內)에 한림(翰林) 기전룡(奇田龍)의 부인 손씨(孫氏)가 남편이 망명 후에도 21세에 혼자되어 시어마니를 극진히 모셨다는 전설과 열녀각(烈女閣)이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세보(世譜)]

세걸(世傑)
8세. 고려 때 공민왕 때에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하였다.

중평(仲平)
8세. 1370년경에 사신분. 영도첨의정승(領都僉議政丞) 현(顯)의 큰아들이요, 공조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버지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중직대부(中直大夫) 직장(直長)을 지냈고 고려사(高麗史)에는 아버지와 숙윤, 중수(仲修)와 함께 화(禍)를 당하였다 하고 잠영보(簪纓譜 ; 만성보의 하나)에는 조선왕조(朝鮮王朝)에 처음 들어왔다 하였다. [세보(世譜)]

중민(仲敏)
8세. 1370년경에 사신분. 영도첨의정승(領都僉議政丞) 현(顯)의 셋째 아들이요, 사재감(司宰監) 판사(判事) 숭(崇)의 아버지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랑장(郞將)인데 후손(後孫)들은 황해도(黃海道) 재령(載寧), 금천(金川)에서 번영(繁榮)하고 있다. [세보(世譜)]

중수(仲修)
8세. ?~1371. 영도첨의정승(領都僉議政丞) 현(顯)의 다섯째 아들이요, 참판(參判) 질(質)의 아버지이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지평(持平)으로 있다가 아버지와 화(禍)를 입었다. [세보(世譜)]

면(勉)
9세. 1390년경에 사신분. 직장(直長) 중평(仲平)의 아들이요 정무공(貞武公) 건(虔)의 아버지이다.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아들이 귀한 사람이 되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다. [세보(世譜)]

질(質)
9세. 1400년경에 사신분. 지평(持平) 중수(仲修)의 넷째 아들이요, 승지(承旨) 시경(始敬)의 아버지이다. 조선초(朝鮮初)의 문신(文臣)으로 세종조(世宗朝)에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문종조(文宗朝)에 강화부사(江華府使)를 거쳐 세조조(世祖朝)에 부평부사(富平府使),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를 역임하고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세보(世譜)]

분(賁)
9세. 1400년경에 사신분. 지평(持平) 중수(仲修)의 다섯째 아들이요, 진사(進士) 자환(自煥)의 아버지이다. 조선초(朝鮮初)의 문신(文臣)으로 단종조(端宗朝)에 판관(判官)을 거쳐 부사(府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세보(世譜)]

건(虔)
10세. 1390~1460. 중흥조(中興祖). 호(號)는 현암(眩庵)이며 전(前)에는 청파(靑坡)였다,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고 공조전서(工曹典書) 면(勉)의 아들이며 조봉대부(朝奉大夫)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축(軸)의 아버지이다. 공은 성품이 맑고 검소하고 정고(貞苦)하여 작은 행실도 반드시 조심하며 글읽기를 좋아하여 이름이 높아 세종 24년 1442년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다. 그뒤 연안(延安) 군수가 되었는데, 군민(郡民)들이 붕어를 잡아 바치는 것 때문에 그물질하여 잡기에 피곤해 하니 3년 동안 먹지 않고 또 술도 마시지 않았다. 체임(遞任)하여 돌아올 때에 부로(父老)들이 전송하니, 공이 종일토록 마시어도 취하지 않았다. 부로들이 탄식하기를, '이제서야 우리 백성을 위하여 마시지 않은 것을 알겠다.' 하였다. 또 제주(濟州)를 안무(安撫)하는데, 백성들이 전복[鰒魚]을 잡아 바치는 것을 괴롭게 여기니, 역시 3년 동안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제주의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집의, 형조참의,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에 부임, 선정을 베풀어 이르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1449년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승하하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1451년(문종 1)에는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1457년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당시 나이 어린 단종이 유약함을 기화로 권력을 농단하고 있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였으며, 공론의 보장을 요구하였고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번이나 그를 찾았지만, 눈은 뜨고 있으나 볼 수없다는 청맹(靑盲)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으므로 처음 호는 청파(靑坡)였다가 이때부터 현암(眩庵)이 되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으로 꼽기도 한다.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니, 청렴하고 결백하여 절개를 지키는 것이 정(貞)이요, 백성에게 모범되게 하여 복종시키는 것이 무(武)이다. 공주 동학사 숙모전 및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자세한 업적(業蹟)은 신도비문(神道碑文)에 기재(記載)되어있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명신록(明臣錄), 세보(世譜)]

축(軸)
11세. 1418~1464. 자(字)는 당지(當之)며 정무공(貞武公) 건(虔)의 아들이요 응교(應敎) 찬( )의 아버지이다. 단종조(端宗)에 주부(主簿)를 거쳐 세조조(世祖朝)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역임했으며 아들 찬( )이 귀한 사람이 되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추증(追贈)되었고 후에 증손자(曾孫子) 대항(大恒)이 귀한 사람이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증(贈)했다. [세조실록(世祖實錄), 세보(世譜), 국조보감(國朝寶鑑)]

찬( )
12세. 1443~1492. 자(字)는 사빈(士빈)이요, 성품(性品)이 강경(剛勁) 정직(正直)하였다. 시호(詩號)는 정렬(貞烈)이고 장령(掌令) 축(軸)의 둘째 아들이며 정무공(貞武公) 건(虔)의 손자이고 지평(持平) 형(逈)의 아버지이다. 1474년(성종 5년) 갑오(甲午)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주서(注書), 이조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예문관(禮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1484년 갑진(甲辰)에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을 역임(歷任)했으며 외직(外職)으로는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역임했다. 후에 손자 대항(大恒)이 귀한 사람이 되어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저( )
12세. 1483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수량(遂良)이요 장령(掌令) 축(軸)의 셋째 아들이다. 1483 계묘년(癸卯年)에 사마양시(司馬兩試)로 1490년(성종 21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2등으로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에 선발되고 연산군조(燕山君朝)에 예문관봉교(禮文館奉敎) 공조좌랑(工曹佐郞)을 거쳐 첨정(僉正)으로 함경도채은경차관(咸鏡道採銀敬差官)으로 함경도(咸鏡道) 은광(銀鑛) 개발(開發)을 답험(踏驗)했다. 중종조(中宗朝) 부평부사(富平府使)에 이르렀다.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재직(在職)시 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編纂)에 참여(參與)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형(逈)
13세. 1501년경에 사신분. 처음 이름은 매(邁), 자(字)는 자고(子高)고 응교(應敎) 찬( )의 큰아들이요,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대복(大復)의 아버지이다. 1501 신유년(辛酉年)에 사마양시(司馬兩試)로 1516(중종 11년) 병자년(丙子年) 별시(別試)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동생 준(遵)과 같이 쌍벽(雙壁)을 이루었으며 벼슬은 정자(正字), 주서(注書), 무장현감(茂長縣監), 정랑(正郞)을 거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이름. 손자(孫子) 양호관찰사(兩湖觀察使) 영( )이 귀(貴)한 사람이 되어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兼) 참찬관(參贊官), 예문관(禮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원(遠)
13세. 1481~1522. 자(字)는 자허(子虛)요 응교(應敎) 찬( )의 둘째 아들이며 진용교위(進勇校尉) 대익(大益)의 아버지이다. 충순위(忠順衛) 돈용교위(敦勇校尉)로 후에 손자 효근(孝謹)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선무훈(宣武勳)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성균관사(春秋館成均館事)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추증(追贈)하다. 동생 복재(服齋) 준(遵)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고 1521년 화(禍)를 당함에 벼슬에 뜻을 버리고 호남(湖南)의 장성(長城)에 동생 진(進)과 더불어 낙남(落南)하여 바로 그 다음해인 1522년에 돌아가시고 부인은 1523년에 돌아가시어 아들 대익(大益), 대유(大有), 대이(大 ) 세분이 20대 내외(內外)로 타향(他鄕)에서 고난(苦難)이 많았을 것이나 그 후손(後孫)들은 지방의 대성(大姓)으로 번영(繁榮)하였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괄(适)
13세. 152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자용(子容)이요, 응교(應敎) 찬( )의 셋째 아들이요 장령(掌令) 대정(大鼎)의 아버지이다. 벼슬은 별좌(別坐)를 지내시고 1521년 동생 준(遵)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은거(隱居)하여 시와 글로 생(生)을 보냈다. [세보(世譜)]

진(進)
13세. 1487~1555. 자(字)는 자순(子順)이요, 호(號)는 물재(勿齊)이며 응교(應敎) 찬( )의 넷째 아들이고 승지(承旨) 대림(大臨)의 아버지이다. 1522 임오년(壬午年)에 진사(進士)로 1527 정해년(丁亥年)에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 대승(大升)이 종계변무(宗系辨誣) 광국훈(光國勳)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추증(追贈)하고 덕성군(德成君)을 봉(封)하다. 동생 준(遵)과 같이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다가 동생이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여 1521년에 화(禍)를 당하자 둘째 형 원(遠)과 함께 낙남(落南)하여 호남(湖南)의 광주(光州)에 세거(世居)하고 후손들이 번영(繁榮)하여 대성(大姓)을 이루었다. [광주읍지(光州邑誌), 세보(世譜)]

준(遵)
13세. 1492~1521. 자(字)는 자경(子敬)이요, 호(號)는 복재(服齋) 또는 덕양(德陽)이며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응교(應敎) 찬( )의 다섯째 아들이요 한성판윤(漢城判尹) 대항(大恒)의 아버지이다. 1513 계유년(癸酉年)에 사마양시(司馬兩試)로 1514(중종 9년) 갑술년(甲戌年) 별시(別試)에 문과(文科) 제5등으로 급제(及第)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正字)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으며, 1516년 저작박사(著作博士)로 천문예습관(天文隸習官)을 겸하여 역임한 뒤 호당(湖堂)에 선발(選拔)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수찬(修撰), 검상(檢詳), 장령(掌令), 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하여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혁신정책(革新政策)을 급히 실행하려다가 수구파(守舊派)에게 몰려 1519년 기묘년(己卯年)에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한 8현(賢) 중의 한 분으로 아산(牙山)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다시 함경도(咸鏡道) 북단(北端)의 온성(穩城)으로 유배(流配)되어 어머니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에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명령(命令)에 의해 자결(自決)하였다. 1545년(인종 1년) 을사년(乙巳年)에 신원(伸寃)되었다. 아들 대항(大恒)이 귀한 사람이 되어 이조판서(吏曺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추증(追贈)되었다. 20대(代)에 성리학(性理學)에 정통(精通)하여 우리나라에 빛을 내었고 시에도 능하여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아산(牙山)의 아산서원(牙山書院), 온성(穩城)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종성(鐘城)의 종산서원(鐘山書院) 등 7개의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에 덕양유고(德陽遺稿), 무인기문(戊寅記聞), 덕양일기(德陽日記), 복재문집 등이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여러문헌, 세보(世譜)]

대익(大益)
14세. 154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원길(元吉)이요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된 원(遠)의 큰아들이며 효관(孝寬)의 아버지이다. 진용교위(進勇敎尉)에 이르렀다. [세보(世譜)]

대유(大有)
14세. 154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덕우(德優)요 참판에 추증(追贈)된 원(遠)의 둘째 아들이며 금강공(錦江公) 효간(孝諫)의 아버지이다. 진용교위(進勇敎尉) 용양위(龍?衛)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다. 아들 효근(孝謹)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선무공(宣武功)으로 호조판서(戶曺判書)를 추증(追贈)하고 고흥군(高興君)으로 봉(封)해졌다. [세보(世譜)]

대이(大 )
14세. 154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덕양(德養)이요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된 원(遠)의 셋째 아들이며 장사랑(將仕郞) 효상(孝祥)의 아버지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세보(世譜)]

대정(大鼎)
14세. 155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사수(士受)요 별좌(別坐) 괄(适)의 둘째 아들이며 직장(直長) 경인(敬仁)의 아버지이다. 1573년(선조 6) 음보(蔭補)로 종9품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을 때 조정에서 6품직인 유일문사(遺逸文士)로 승진상신이 있어 선조(宣祖) 12년 1579년에 정5품의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581년에 유화(柳和)와 유온(柳溫) 사이에 벌어진 재산에 관한 소송이 상부기관에서 잘못 처리된 것을 알면서도 그 부당함을 말하지 않았다 하여 언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583년(선조 16년)에 재기용되어 정4품의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특제(特除) 하였다. 이때 태조의 정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태묘(太廟)에의 배향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공이 양사(兩司)는 마땅히 부묘(부廟)를 청하여야 되는데 건각치제(建閣致祭)만을 청한 점을 논박하자 그의 정연한 이론 앞에 양사는 일괄사표를 제출하였다. 공은 타인(他人)의 이목(耳目)이나 사사로운 사정(私情)을 전혀 개의하지 않고 논리가 정연하며 오직 대의명분(大義名分)에 따라 모든 일을 시행해나갔다. [선조실록(宣朝實錄), 석담일기(石潭日記), 세보(世譜)]

대항(大恒)
14세. 1519~1564. 자(字)는 가구(可久)요 시호(諡號)는 정견(貞堅)이다. 복제(服齊) 준(遵)의 아들이요 덕창부원군(德昌府院君) 응세(應世)의 아버지이다.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1546(명종 1년) 병오년(丙午年) 식년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及第)하여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使)로 나가 민폐(民弊)를 살폈다. 1552년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1553년 헌납(獻納)이 되었다. 1554년 사간(司諫)이 되고 이어 전한(典翰),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거쳐 1557년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61년 대사간으로서 재변소(災變疏) 6조목을 올려 경천(敬天), 법조(法祖), 무학(務學), 납간(納諫), 임현(任賢), 애민(愛民)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당시 권신이던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켜 새로 등용된 사류(士類)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때 이량을 옹호하던 사헌부의 죄상도 함께 탄핵하여 이량을 강계로 귀양보내고 그 일파인 훈구세력의 관직을 삭탈하는 한편 사림(士林)의 화(禍)를 면(免)하게 하였는데 즉일(卽日)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1564년 공조참판(工曹參判),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가 3일만에 돌아가셨다. 손자 자헌(自獻)이 귀한 사람이 되어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으로 추증(追贈)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방목(榜目), 인물고(人物考), 세보(世譜)]

대림(大臨)
14세. 1526~1565. 자(字)는 돈언(惇彦)이요 덕성군(德成君) 진(進)의 큰아들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효분(孝芬)의 아버지이다. 종사랑(從仕郞)으로 동부참봉(東部參奉)을 지내고 광국원종훈(光國原從勳)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세보(世譜)]

대승(大升)
14세. 1527~1572. 자(字)는 명언(明彦)이요 호(號)는 고봉(高峰) 또는 존재(存齋)이다. 덕성군(德成君) 진(進)의 둘째 아들이요, 어머니는 강영수(姜永壽)의 따님이시며, 군기사(軍器寺) 첨정(僉正) 효증(孝曾)의 아버지이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23세이던 1549년(명종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1년 과거에 학격할 것이었으나 당시 시관(試官)이던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이 사림파의 등용을 꺼려하여 낙방하고 32세되던 1558년 무오년(戊午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사관(史官)이 되었다. 1563년 호당(湖堂)에 선발(選拔)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3월에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다. 1563년 8월 사정(司正)으로 있을 때, 신진사류(新進士類)의 영수(領袖)로 지목되어 훈구파(勳舊派) 이량(李樑)의 시기로 삭직(削職)되었다가 4촌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564년 2월에 검토관으로 언론의 개방을 역설하였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1566년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 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년)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이어 전한(典翰)이 되어서는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追贈)을 건의하였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하였고, 1570년 대사성으로 있다가 영의정 이준경(李浚慶)과의 불화로 해직당하였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 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 고부(古阜)에서 돌아가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문학에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학문에 대하여도 독학(獨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31세 때 주자대전(朱子大全)을 발췌하여 주자문록(朱子文錄) 3권을 편찬할 만큼 남보다 학문에 의욕이 강하였다. 32세에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장성에서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金麟厚), 이항(李恒)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토론하는 동안 선학(先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한 바가 많았으며,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보게 되자 당시의 통유(通儒)인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서울에서 3번 만나 의견을 나누었고 4단7정(四端七情)을 토론(討論)하는 왕복(往復) 편지(便紙)가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던 것은 너무나도 세상에 유명하며 이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유학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논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은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반대하고 사단칠정이 모두 다 정(情)이다.라고 하여 주정설(主情說)을 주장하였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수정하여 정발이동기감설(情發理動氣感說)을 강조하였다. 또, 이약기강설(理弱氣强說)을 주장, 주기설(主氣說)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主理說)과 맞섰다. 이 논변의 왕복서한은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 2권에 남아 있다. 퇴계(退溪)도 말년(末年)에 공(公)의 학설(學說)을 많이 추종(追從)하였으며 공과는 26년의 선후배이나 후배로 대하지 않고 평등하게 의논하였다. 왕이 퇴계에게 인재 등용을 물으매 퇴계는 기대승은 학식이 넓고 연구가 깊어 그와 비교할 사람이 드뭅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통유라 할 수 있습니다(박흡초예선견 기비사가위통유 ; 博洽超詣鮮見 其比斯可謂通儒) 라하고 추천(推薦)하였다. 공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복제, 기준의 후예답게 경세택민(經世澤民)을 위한 정열을 간직하였고, 정치적 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經筵講論)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理財養民論), 숭례론(崇禮論), 언로통색론(言路通塞論)으로 분류된다. 공은 학행(學行)이 겸비된 사유(士儒)로서 학문에 있어서는 공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 있어서는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인 탁견을 진주(進奏)하였다. 또 서예에도 능했으며 돌아가신 후 1590년(선조23)에는 생전에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쓴 공으로 광국공신 3등(光國功臣三等)에 추록(追錄)되었고 덕원군(德原君)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공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鄭雲龍),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최시망(崔時望) 등이 있다. 저서(著書)에는 종계변무진문록(宗系辨誣秦文錄), 논사록(論思錄), 이퇴계왕복서간집(李退溪往復書簡集), 시문집(詩文集) 등으로 구성된 고봉집(高峯集) 15책이 있다. 조정(朝廷)에서는 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기제사를 지내는 불천위(不遷位)를 명령하였고 광주(光州) 월봉사(月峰祠), 나주(羅州) 경현원(景賢院) 고양(高陽) 덕양서원(德陽書院) 등에 향사(享祀)하다.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명신록(明臣錄) 외 기타문헌, 세보(世譜)]

의( )
15세. 157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경수(景遂)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대복(大復)의 큰아들이며 증(贈)호조참판(戶曹參判) 성헌(誠獻)의 아버지이다. 과거(科擧)를 거치지 않는 음서로 단양(丹陽),안악군수(安岳郡守)에 이르렀고 손자 협(協)이 병자호란 때에 능한산성에서 순절(殉節)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지니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세보(世譜)]

효간(孝諫)
15세. 1530~1593. 자(字)는 백고(伯顧)이요, 호(號)는 금강(錦江) 또는 인제(忍齊)이다, 고흥군(高興君) 대유(大有)의 큰아들이요, 사과(司果) 계헌(啓獻)의 아버지이다. 천자(天資)가 준위(俊偉)하고 내화외엄(內和外嚴)하며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절인(絶人)하고 효행(孝行)이 있었는데 성리학(性理學)을 전공(專攻)하였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수제자(首弟子)이다, 일생을 학문과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호남의 은덕군자(隱德君子)라고 하였다. 특히, 김인후가 그에게 지어준 우주의 중간에 두 분이 있는데, 공자는 원기(元氣)이고, 주자는 참됨〔眞〕이다.라는 시는 도(道)를 전해받은 시로 알려졌다. 동문인 김천일(金千鎰), 정철(鄭澈), 변이중(邊以中)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문하에서 오희길(吳希吉)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임란(壬亂)에 장성(長城) 남문(南門)에서 창의(倡義)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추산서원(秋山書院), 오산원(鰲山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인물록(人物錄), 세보(世譜)]

영( )
15세. 1536~?. 자(字)는 경연(景延)이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대복(大復)의 둘째 아들이며 군수(郡守) 홍헌(弘獻)의 아버지이다. 1565 갑자년(甲子年)에 생원(生員)으로 1568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였다. 홍문록(弘文錄)에 들었으며 1581년(선조14) 선천군수(宣川郡守)로 재직시(在職時)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선조(宣祖)로부터 표리(表裡) 1벌을 하사(下賜)받았다. 승지(承旨)를 역임(歷任)하고 1589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냈으며 1592년에는 형조참의(刑曹參議) 겸(兼) 강원도순찰사(江原道巡察使)를 1593년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等)에 녹훈(錄勳)되었다. 관직(官職)은 양호관찰사(兩湖觀察使) 겸(兼)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이르렀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응세(應世)
15세. 1539~1585. 자(字)는 경우(景遇)요, 시호(諡號)는 삼강(三綱)이다. 한성판윤(漢城判尹) 대항(大恒)의 큰아들이요 영의정(領議政) 자헌(自獻)의 아버지이다. 아들 자헌(自獻)의 귀(貴)로 보조공신(補祚功臣)으로 대광보국(大匡補國) 숭정대부(崇政大夫)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고 덕창부원군(德昌府院君)을 봉(封)하다. 선조(宣祖) 때에 효행(孝行)으로 정려(旌閭)를 명령받고 삼강록(三綱錄)에 기록이 있다. 명(明)나라 사신으로 명필(名筆)인 주지번(朱之蕃)이 쓴 묘비명(墓碑銘)과 조선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護)의 묘지명이 있다. [삼강록, 세보(世譜)]

효설(孝說)
15세. 1590년경에 사신분. 고흥군(高興君) 대유(大有)의 둘째 아들이요 언손(彦孫)의 아버지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만경(萬頃)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원종훈(原從勳)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을 추증(追贈)하다. [세보(世譜)]

효근(孝謹)
15세. 1542~1597. 자(字)는 숙흠(叔欽)이요 고흥군(高興君) 대유(大有)의 셋째 아들이며 행원군(幸原君) 종헌(宗獻)의 아버지이다. 기질(氣質)이 강명(剛明)하고 필묵(筆墨)에 능(能)하였는데 때는 승평세월(昇平歲月)로 무비(武備)가 소홀(疎忽)하였다. 공(公)의 호방한 성격은 붓을 던지고 무예(武藝)를 훈련(訓練)하여 1579(선조 12년) 기묘년(己卯年)에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당시 오랫동안 평화가 계속되자 군비가 소홀하였으므로 왕명으로 주군(州郡)을 순회(巡廻) 하여 군비(軍備) 상태를 두루 점검하였다. 조신(朝臣) 중에 공(公)을 문필(文筆)이 부족하다고 무소(誣疏)한 자(者)가 있어 공(公)이 순회(巡廻) 선전(宣傳)의 임무(任務)를 마치고 돌아옴에 선조(宣祖)는 공(公)에게 지필(紙筆)을 주면서 글 짓기를 명(命)함에 공(公)은 즉석(卽席)에서 가국위여발(家國危如髮) 군친하소귀(君親何所歸) 고신누횡억(孤臣淚橫臆) 신월망의의(新月望依依) 이라고 써 올리니 선조는 이 글을 읊으면서 다른 신하들에게 이 시에 대한 운(韻)을 지으라 명(命)하니 모두들 자리를 피하여 나갔다. 1590년에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배수(拜授)하였다가 1592년 임진란(任辰亂)에 전함(戰艦)과 병기(兵器)를 수리하여 수군대장(水軍大將) 원균(元均)의 선봉(先鋒)으로 사천(泗川)에서 왜(倭)의 대군(大軍)과 싸워 대첩(大捷) 하는 등 여러 차례 해전에 참가하여 그때마다 선봉이 되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병으로 남해현령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가는 길에 적병을 만나, 모친이 물에 빠져 자결하자 공도 뒤따라 자결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추록 병조판서(兵曹判書)와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추증(追贈)하고 개백군(皆伯君)을 봉(封)하였으며 왕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재(致祭)하고 묘비(墓碑) 신도비(神道碑)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을 하사하고 4대가 지나도 위패(位牌)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기제사 지내는 불천위(不遷位)를 명령(命令)하였다. 공의 따님이신 이문룡(李文龍)의 부인 또한 왜적에 맞서 자결(自決)한 열녀(烈女)로 왕명으로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서귀(西歸) 이기발(李起勃)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고 무안(務安) 도산사(桃山祠)에 향사(享祀)하다. [선조실록(宣祖實錄), 서귀유고(西歸遺稿), 세보(世譜)]

훈(薰)
15세. 1545~? , 자(字)는 경방(景芳)이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대복(大復)의 셋째 아들이며 만호(萬戶) 세헌(世獻)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부평부사(富平府使), 삼수(三水), 안성(安城), 서산군수(瑞山郡守), 훈련원정(訓練院正), 인산첨사(麟山僉使)를 거쳐 충청수군절도사(忠淸水軍節度使)를 지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세보(世譜)]

난(蘭)
15세. 1548~1630. 자(字)는 경형(景馨)이요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대복(大復)의 넷째 아들이며 사간(司諫) 만헌(晩獻)의 아버지이다. 진사(進士)이며 음서로 장수현감(長水縣監)을 지내고 나이가 83세라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증(贈)하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세보(世譜)]

효증(孝曾)
15세. 1550~1616. 자(字)는 백노(伯魯)요 호(號)는 함제(涵齊)인데 고봉(高峰) 대승(大升)의 큰아들이며 현풍현감(玄風縣監) 정헌(廷獻)의 아버지이다. 문장(文章)이 숙성(熟成)하여 진사(進士)로서 연은전(延恩殿) 참봉(參奉)으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취임(就任)하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연구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근왕거의(勤王擧義)하여 김덕령(金德齡)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도유사(都有司)로 격문을 짓고 군사를 모집하였다. 양곡(糧穀) 3000석과 병사(兵士)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각지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그뒤 휘하 의병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용만(龍灣)에 가서 왕의 행재소에 나아가 원군(援軍)하였는데 선조가 기뻐하여 형조정랑에 발탁되었고, 이어서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으로 또 동복현감(同福縣監)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상소(上疏)하여 사퇴(辭退)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며 저서로 근왕록(勤王錄) 1권이 있다. [광주읍지(光州邑誌), 고봉집(高峯集), 대동야승(大東野乘), 세보(世譜)]

효분(孝芬)
15세. 1553~?. 자(字)는 백형(伯馨)이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대림(大臨)의 아들이며 방헌(邦獻)의 아버지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龍 尉)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고 원종훈(原從勳)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추증(追贈)하다. [세보(世譜)]

봉년(鳳年)
아들 효복(孝福)이 호성삼등공신(扈聖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므로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고성군(高城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효복(孝福)
1592년경에 사신분. 증(贈) 고성군(高城君) 봉년(鳳年)의 둘째 아들이요 신남(信男)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구성부사(龜城府使), 동래부사(東來府使), 순천부사(順天府使), 충청수사(忠淸水使)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밀양부사(密陽府使)를 역임(歷任)했다. 임란(壬亂)에 선조(宣祖)의 어가(御駕)를 의주(義州)까지 호위(護衛)한 공(功)으로 1606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冊錄)되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추증(追贈)받았으며 고흥군(高興君)에 습봉(襲封)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명신록(明臣錄), 세보(世譜)]

자헌(自獻)
16세. 1562~1624. 처음이름은 자정(自靖)이요 자(字)는 사정(士靖)이며 호(號)는 만전(晩全)이며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을 봉(封)하였다. 증조부는 응교(應敎) 준(遵)이고 할아버지는 한성부 판윤 대항(大恒)이며, 삼강공(三綱公) 응세(應世)의 큰아들이고 설서(說書) 준격(俊格)의 아버지이다.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 21세에 사마양시(司馬兩試)로 29세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였음으로 명성(名聲)이 높아 선조(宣祖)의 신임(信任)을 받아 한원(翰苑)에 선발(選拔)되어 호당(湖堂)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92년 예문관봉교겸설서(藝文館奉敎兼說書), 병조(兵曺),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정언(正言), 집의(執義), 성균관직강, 홍문관부교리, 보덕(輔德), 사간, 사인(舍人),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승지 등 청요직을 거쳤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進賀使)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1600년 부제학(副提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601년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죽은 최영경(崔永慶)의 원사사건(寃死事件)을 거론(擧論)하여 당시(當時)의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하여 관계자들을 모두 관직(官職)에서 추탈(追奪)하였다. 1602년 왕세자(王世子:광해군)의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서 맹자를 강의했으며, 병조(兵曺), 예조판서(禮曹判書),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604년 우의정(右義政)이 되어 사임하였으나 허락되지 아니하고, 1605년 좌의정(左義政)에 올랐다. 이때 선조(宣祖)가 서자출신의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폐(廢)하고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소생의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강력히 반대하여 저지(沮止)시켰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柳永慶)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 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시키는 데 공헌했다. 1611년(광해군 3) 대북(大北)의 전횡이 지나치자 사직하였다가, 중추부판사에 전임되었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하던 정온(鄭蘊)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하여 감형케 하여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1617년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廢妃)할 때에 적극(積極) 반대하였으므로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홍원(洪原)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길주(吉州)로 이배되었으며, 강릉에 방귀(放歸)되어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特旨)로 덕평부원군(德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辭職)하였다. 1623년 능양군이 구테타를 일으킬 때 김류, 이귀(李貴) 등이 모의에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 하여 거절하였으며, 또한 정변후에 능양군이 왕위(王位)에 올라 선왕(先王)의 옛 신하들을 불러 인사를 받을 때에 공(公)은 꼭꼭히 바로 서서 배례(拜禮)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언젠가 공(公)이 화(禍)를 당하리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中道付處)되었다가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해서 김류(金류)가 공(公)을 살해하려고 하자 인조는 원로대신을 살해하지 못한다고 반대하다가 1624 갑자년(甲子年) 1월 24일 서대문 자택에서 왕명에 의해 자결하시었고, 그 일족도 몰살당했다. 1627년 이원익(李元翼), 이귀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당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는 갑자년간사(甲子年間事) 오상목견지(吾嘗目見之) 만전원사사(晩全寃死事) 언염루선수(言念淚先垂)라고 하였다.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인조실록(仁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세보(世譜)]

윤헌(允獻)
16세. 1573~1624. 처음 이름은 충헌(忠獻) 또는 내헌(乃獻)이며 자(字)는 경이(敬而) 호(號)는 사집(士執)이다. 삼강공(三綱公) 응세(應世)의 둘째 아들이며 만전공(晩全公) 자헌(自獻)의 동생이고 정언(正言) 수발(秀發)의 아버지이다. 1605년 을사년(乙巳年)에 현감(縣監)으로 있다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1608년에 승문원박사가 되고, 광해군 때 공조정랑(工曹正郞) 등을 지냈다, 1614년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승진되고, 곧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議院文學),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내었다. 1617년(광해군 9)에 형인 영의정 자헌이 광해군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반대하여 유배될 때 형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뒤 진사 이건원(李乾元)이 서궁폐출(西宮廢黜)에 반대한 이각(李覺)과 함께 처형하자고 주장하여 수차에 걸쳐 국문을 받았으나 뚜렷한 실증이 없어 방면되었다. 그러나 능양군의 구테타가 성공한 이후 오히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제거할 때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았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난군과 내응했다는 혐의로 온 집안이 추국을 받아 끝까지 불복하다가 형이 먼저 죽고, 그뒤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세보(世譜)]

홍헌(弘獻)
16세. 161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군가(君可)요 양호관찰사(兩湖觀察使) 영( )의 큰아들이며 혼(渾)의 아버지이다. 음서로 순천군수(順天郡守)를 지냈다. [세보(世譜)]

만헌(晩獻)
16세. 1593~1651. 자(字)는 시가(時可)요 호(號)는 백봉(伯峰)이다. 장수현감(長水縣監) 난(蘭)의 아들이요 진사(進士) 인( 寅)의 아버지이다. 생원(生員)으로 1628년(인조 6) 무진별시(戊辰別試)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함경도(咸鏡道) 단천(端川)에 공(公)의 기념비(記念碑)인 거사비(去思碑)가 있고 옆에 열녀(烈女) 관비(官婢) 일선(日仙)의 정문(旌門)이 있는데 이는 공(公)의 아들 인( 寅)의 비처(婢妻)이다. [인명사전(人名辭典), 방목(榜目), 세보(世譜)]

신헌(信獻)
16세. 161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서언(瑞彦)이며 효관(孝寬)의 둘째 아들이요 병절교위(秉節校尉) 박(博)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무안(務安) 현감(縣監)을 지냈다. [세보(世譜)]

순헌(舜獻)
16세. 161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성민(聖民)이요 병절교위(秉節校尉) 효홍(孝弘)의 큰아들이며 병절교위(秉節校尉) 상( )의 아버지이다.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 [세보(世譜)]

계헌(啓獻)
16세. 161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사옥(士沃)이요 금강공(錦江公) 효간(孝諫)의 큰아들이며 처겸(處謙)의 아버지이다. 용양위(龍 衛) 부사과(副司果)에 이르렀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추증(追贈)하다. [세보(世譜)]

종헌(宗獻)
16세. 1575~1643. 처음 이름은 여헌(汝獻)이요 자(字)는 경헌(景獻)이며 호(號)는 수허(守虛) 또는 거악(擧岳)이다. 개백군(皆伯君) 효근(孝謹)의 큰아들이요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 율(慄)의 아버지이다. 임진왜란에 아버지를 따라 종군(從軍)하였고 1594 갑자년(甲子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내고 여러 군읍재를 역임하고 1605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행원군(幸原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637년 충청수사(忠淸水使)를 지낼 때 왕은 ‘모(謨)는 수전(水戰)에 정통(精通)하니 사람을 제대로 얻었다’고 크게 기뻐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때 파주목사(坡州牧使)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침략(侵略)하는 호병(胡兵)을 협공(挾攻)한 공(功)으로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에 특제(特授)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인물록(人物錄), 세보(世譜)].

창헌(昌獻)
16세. 162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사명(士明)이요 사과(司果) 효분(孝芬)의 둘째 아들이며 윤(玧)의 아버지이다. 공(公)의 음덕(陰德)으로 후손(後孫)이 번영(繁榮)하였다. [세보(世譜)]

영헌(齡獻)
16세. 1581~1655. 처음 이름은 중선(仲宣)이요 호(號)는 덕산(德山)이다. 효민(孝閔)의 큰아들이요 대명(代鳴)의 아버지이다. 공(公)의 음덕(陰德)으로 고령(高靈)에서 자손(子孫)이 번영(繁榮)하였다. [세보(世譜)]

의헌(義獻)
16세. 1587년(선조 20)~1653(효종 4). 자(字)는 사직(司直)이며 호(號)는 기은(棄隱) 또는 육오당(六吾堂)이다. 사과(司果) 효분(孝芬)의 셋째 아들이요 전( )과 예승문원(隸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침(琛)의 아버지이다. 병절교위(秉節校尉) 용양위(龍 尉)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동지(同志)와 더불어 거의(擧義)하여 여산에 이르자 화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유고(遺稿) 1권(卷)이 있고 용동사(龍洞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세보(世譜)].

정헌(廷獻)
16세. 1620년경에 사신분. 자(字)는 덕회(德晦)요 함제공(涵齊公) 효증(孝曾)의 아들이다. 음서로 현풍현감(玄風縣監)을 지냈다. [정묘의록(丁卯義錄), 금사계년보(金沙溪年譜), 세보(世譜)]

익헌(益獻)
16세. 1620년경에 삶. 한성판윤 대항의 손자이고 현령(縣令) 직남(直男)의 아들이다. 종친(宗親) 이문빈(李文賓)의 사위가 되어 궁중(宮中)에 친해졌다. 광해군 때 무과(武科) 급제하여 1624년에 이괄의 난 때 그의 휘하(麾下) 장수(將帥)로 가담하였으나 안현(鞍峴)에서 관군에게 대패하여 도망가다가 이수백(李守白)과 함께 모의하여 이천 묵방리(墨坊里)에서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다, 조정에서는 이괄을 죽이는 자를 포상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난에 적극 참여했으므로 처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으나 왕과 이귀의 두둔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624년 고변에 연루되어 진도에 유배되었으나 1631년 이귀와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석방되어 원하는 곳에 살게 하였다. 궁궐재건과 배 만드는데 공을 세워 광해군의 특명으로 고원군수에까지 올랐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보(世譜)]

효일(孝一)
16세. 1595~1636. 자(字)는 행원(行源)이요 참봉(參奉) 지(智)의 아들이며 윤선(允宣)의 아버지이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경성(鏡城) 방저 만호(萬戶)로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재령군수(載寧郡守)와 함께 병사(兵士)를 일으켜 싸우다 토산(兎山)에서 전사(戰死)하였다. 그 후 전공(戰功)으로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을 추증(追贈)하다. [재령읍지(載寧邑誌), 세보(世譜)]

협(協)
17세. 1572~1627. 자(字)는 여인(汝寅)이요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성헌(誠獻)의 둘째 아들이고 빙고별제(氷庫別提) 진경(震慶)의 아버지이다. 1601년(선조 34년) 신축년(辛丑年)에 식년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1604년 검열(檢閱)이 된 뒤 설서(說書),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홍문관박사(弘文館博士), 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 병조좌랑(兵曹佐郞), 수찬(修撰), 부교리(副校理) 장성부사(長城府使)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을 역임하였다. 161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를 거쳐 1613년(광해군 5년) 강화부사가 되었을 때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대하였다하여 파직, 하옥되었다. 1617년에 풀려나 1620년에 다시 기용되어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고 1626년(인조 4)에 선천부사(宣川府使)가 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 의주가 함락되고 적이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에 이르자 수성장(守城將)으로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다시 선천에 돌아와 적과 항전하였다. 이 당시 적은 '항복하라'는 글을 보내왔으나 이를 불태우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1월 18일에 순절(殉節)하였다. 왕이 치제(致祭)하여 좌찬성(左贊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덕풍군(德豊君)울 봉(封)하였으며 충신(忠臣) 정려(旌閭)를 명령(命令) 했다.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명신록(名臣錄), 세보(世譜)]

율(慄)
17세. 1656~1728. 자(字)는 관보(寬甫)요 호(號)는 운호(雲湖)이다. 행원군(幸原君) 종헌(宗獻)의 큰아들이고 사직(司直) 진영(震英)의 아버지이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이 되었고 1617년 명(明)나라 공성황후(恭聖皇后)로부터 관복(冠服)과 종계변무합경(宗系辨誣合慶)을 하사(下賜)받았다.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고 충무위(忠武衛)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아버지 행원군(幸原君) 종헌(宗獻)을 따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왕의 가마를 호위(扈駕)하여 사정(司正)이 되었다.

준격(俊格)
17세. 1594~1624. 처음 이름은 수격(秀格)이며 자(字)는 붕만(鵬萬)이다, 영의정(領議政) 자헌(自獻)의 큰아들이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된 반룡(攀龍)의 아버지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가 되고, 161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7년 정언(正言), 병조(兵曺),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홍길동의 작가인 허균(許筠)과는 같은 북인(北人)의 스승과 제자사이로 친하였지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에 찬성하지 않은 아버지와는 반대파가 되었고 아버지는 길주로 유배되어 사형될 위기에 놓이자,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 자주 출입하며 알게된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어 허균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하여 1618년에 처형되게 하였다, 그러나 고변을 늦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자신도 강릉에 유배당하였다. 1621년 다시 기용되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다시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624년 아버지가 역모죄를 쓰고 잡히고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반란에 내응을 우려하여 일족과 함께 죽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문과방목(文科榜目), 청선고(淸選考), 세보(世譜)]

순격(順格)
17세. [?~1624]. 자(字)는 수립(秀立)이며 영의정(領議政) 자헌(自獻)의 둘째 아들이요 영순부위(迎順副尉) 진민(震民)의 아버지이다. 1616년 병진년(丙辰年)에 무과에 급제(及第)하였고 1619년(광해군 11)에 음보(蔭補)로 해남현감이 되었고, 1620년 장흥부사로 승진되었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능양군이 구테타에 성공한 후인 1623년 7월 아버지 자헌이 역모죄로 쓰고 잡히자 함께 관직이 삭탈되어 유배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에 내응할 우려가 있다 하여 일가족이 모두 죽었다. [방목(榜目), 세보(世譜)]

수발(秀發)
17세. 1596~1624. 자(字)는 자산(子山)이요 호(號)는 창랑정(滄郞亭)이다. 안악군수(安岳郡守) 윤헌(允獻)의 큰아들이다. 1612년에 진사, 1616 병진년(丙辰年)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검열(檢閱), 봉교관(奉敎官)을 거쳐 1621년 예조좌랑(禮曹佐郞), 1622년 정언(正言)에 이르렀다. 1623년 능양군의 구테타가 성공한 후에 김의민(金義敏), 이유림(李有林) 등의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이괄의 난에 온 가족과 함께 죽었다 [방목(榜目), 세보(世譜)]

침(琛)
17세. 1621~1654. 자(字)는 여보(汝寶)이며 의헌(義獻)의 둘째 아들이요 진성(震省)의 아버지이다. 1651 신묘년(辛卯年)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예승문원(隸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지냈다. [방목(榜目), 세보(世譜)]

서익(瑞益)
17세. 1621~1720. 자(字)는 사징(士徵)이요 증(贈) 참판(?判) 찬종(讚宗)의 아들이요 진사(進士) 진구(震龜)의 아버지이다. 1681 숙종(肅宗) 정유년(丁酉年)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1720 경자년(庚子年) 9월 23일 돌아가시니 나이가 100세이고 자녀가 9남 2녀이요 손자만 22명 이므로 왕이 동지중추부사 교지문에 오래사는 것은 이프면 욕될까 걱정인데 이시람은 나이들어도 강녕(康寧)하고 자식이 많으면 요절하는 자식이 있을까 걱정이 많아지는데 이사람은 많은 아들을 두고도 일찍 죽은 자식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세상에 희귀(稀貴)한 복(福)받은 사람이라 하였다. [재령읍지(載寧邑志), 세보(世譜)]

진흥(震興)
18세. 1596~1651. 자(字)는 중립(仲立) 또는 원립(元立)이요, 덕풍군(德豊君) 협(協)의 둘째 아들이다. 1624 갑자년(甲子年)에 진사(進士)가 되고 1644 갑신년(甲申年)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비변사(備邊司)에 들었으며 1649년에는 지포(紙砲)를 제조(製造)한 공(功)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51년(孝宗2년)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이르렀으나 이때 김자점의 아들 김욱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었다. [인조실록(仁祖實錄), 효종실록(孝宗實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진탁(震鐸)
18세. 1607~1653. 자(字)는 선명(善鳴), 1624년 18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入格)하였다. 1646년(仁祖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전시(殿試)의 표론(表論)의 시제(試題)가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 죽음이 인조(仁祖)에 의해 저질러졌고 서인(西人)을 억압(抑壓)하기 위한 것임을 비꼬는 내용(內用)으로 인조(仁祖)가 격분(激憤)하여 파방(罷榜)되고 다른 문제(問題)로 전시(殿試)를 치르도록 하자 성균관(成均館)의 사림(士林)으로서 의(義)를 굽힐 수 없다고 귀향(歸鄕)하여 과거(科擧)를 단념(斷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였다. [인조실록(仁祖實錄), 송암집(松巖集)]

진갑(震甲)
18세. 1624~1669. 자(字)는 용경(龍卿)이요 호(號)는 산은(散隱)이다 병절교위(秉節校尉) 상( )의 아들이요 통덕랑(通德郞) 정회(挺會)의 아버지이다. 효종(孝宗)이 북벌(北伐)에 쓰일 인재(人才)를 널리 구하니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이 공(公)을 천거(薦擧)하므로 인견(引見)하여 활과 검(劒)을 하사(下賜)하고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특제(特除)하였다. 이어 별제(別提)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를 역임(歷任)했으나 효종(孝宗)이 승하(昇遐)하니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문집(文集) 2권이 있다.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 도읍지(道邑誌), 세보(世譜)]

명혁(命赫)
18세. 1627~1718. 자(字)는 대이(大而)요 호(號)는 학봉(鶴峰)인데 여강(汝剛)의 아들이요 성작(聖作)의 아버지이다. 공(公)은 가전상언(駕前上言)으로 해서종문(海西宗門)에 군적(軍籍)을 면제(免除)하였고 1664 현종 5년 행주기씨 최초의 족보인 갑진구보(甲辰舊譜)를 처음 편집하여 해서종중(海西宗中)에 공적(功績)이 있다. [세보(世譜)]

진로(震老)
18세. 1632~?. 자(字)는 국빈(國賓)이요 경(憬)의 아들이며 정원(挺元)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이 널리 알려졌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진설(震說)
18세. 1648~1703. 자(字)는 군필(君弼)이요, 증(贈)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원(瑗)의 큰아들이며 증(贈)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정준(挺俊)의 아버지이다. 손자(孫子) 언정(彦鼎)이 귀(貴)해져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추증(追贈)되고 덕평군(德平君)으로 봉(封)하다.[세보(世譜)]

정익(挺翼)
19세. 1627~1670. 자(字)는 자량(子亮)이요 호(號)는 송암(松巖)이다, 진사(進士) 진탁(震鐸)의 둘째 아들이요 호(灝)의 아버지이다. 천자(天資)가 준위(俊偉)하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고 성리학(性理學)과 경전(經傳)에 정통(精通)하였다, 또한 사친(事親)의 절(節)과 경장(敬長)의 도(道)가 극진(極盡)하였으므로 향리(鄕里)가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경사자집(經史子集)과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학(醫學)에 박학(博學)한 산림처사(山林處士)니 우암선생(尤庵先生)께서 유일문사(遺逸文士)로 1681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천거(薦擧)하여 제수(除授)되었으나 출사(出仕)치 않고 뒤이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또한 출사(出仕)치 않았다. 필암서원(筆巖書院)을 이건(移建)하고 제자(弟子)를 양성(養成)하였다. 성리학(性理學)과 경세(經世)를 연구(硏究)한 송암집(松巖集) 4권(卷) 2책(冊)이 전한다.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하였다. [인물고(人物考),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정규(挺奎)
19세. 1641~?. 자(字)는 덕중(德仲)이요 호(號)는 백암(栢巖)이다. 진양(震陽)의 둘째 아들이요 박(博)의 아버지이다. 학행이 널리 알려 졌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정낙(挺洛)
19세. 1648~1732. 자(字)는 중회(仲晦)요 호(號)는 명탄(鳴灘)이다 통덕랑(通德郞) 진웅(震雄)의 둘째 아들이요 준(濬)의 아버지이다. 효행(孝行)이 지극(至極)하였으며 나이가 85세에 이르렀다. [무안읍지(務安邑誌), 세보(世譜)]

정회(挺會)
19세. 1656~1716. 자(字)는 형숙(亨叔)이요 호(號)는 묵재(默齋)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진갑(震甲)의 아들이요 학( )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졌다. [도읍지(道邑誌), 세보(世譜)]

정룡(挺龍)
19세. 1670~1738. 자(字)는 견경(見卿)이요 호(號)는 낙암(樂庵)이다. 진성(震省)의 큰아들이요 제훈(齊勳)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이 출중(出衆)하였으며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아버지의 병환(病患) 때에 손가락을 잘라 진혈(進血)하였고 치가(治家)에 법도(法度)가 있어 향리(鄕里)에서 칭송(稱頌)이 자자했다. 방백(方伯)과 어사(御史)가 누차 관(官)에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행(學行)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를 추증(追贈)하였다. 용동사(龍洞祠)에 배향(配享) 되고 유고(遺稿)로 「낙암집(樂庵集)」 약간편(若干篇)이 전하고 있다. [인물고(人物考), 세보(世譜)].

정후(挺後)
19세. 1676~1722. 자(字)는 계술(繼述)이요 덕평군(德平君) 진설(震說)의 큰아들이며 국천재(菊泉齋) 언관(彦觀)의 아버지이다. 아들 언정(彦鼎)이 귀(貴)해져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겸(兼) 의금부사(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추증(追贈)되고 덕창군(德昌君)으로 봉(封)하다. [세보(世譜)]

정길(挺吉)
19세. 1680~?. 자(字)는 득형(得亨)이요 호(號)는 묵암(默庵)이다, 통덕랑(通德郞) 진현(震現)의 큰아들이요 신겸(信謙)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 졌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연(淵)
20세. 1646~?. 자(字)는 문익(文益)이요 정하(挺夏)의 둘째 아들이요 철상(喆相)의 아버지이다. 지조(志操)와 행검(行儉)으로 널리 알려졌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닙( 最)
20세. 1656~1730. 자(字)는 약수(若水)요 호(號)는 죽림헌(竹林軒)이다. 정하(挺夏)의 셋째 아들이다. 학행(學行)이 널리 알려졌고 향풍(鄕風)을 진작(振作)하고 학문(學問)에 정진(精進)하여 죽림처사(竹林處士)로 칭송(稱頌)되었다. [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복( )
20세. 1687~1739. 자(字)는 래백(來伯)이요 호(號)는 사오당(四吾堂)이다. 송암공(松巖公) 정익(挺翼)의 둘째 아들이며 범상(範相)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이 널리 알려졌다[장성읍지(長城邑誌), 세보(世譜)]

언복(彦復)
20세. 1703~1772. 자(字)는 평숙(平叔)이요 정범(挺範)의 아들이며 학심(學心)의 아버지이다. 공(公)의 음덕(陰德)으로 후손(後孫)이 번영(繁榮)하였다. [세보(世譜)]

언관(彦觀)
20세. 1706~1784. 자(字)는 백첨(伯瞻)이요 호(號)는 국천재(菊泉齋)이다 덕창군(德昌君) 정후(挺後)의 큰아들이며 학덕(學德)의 아버지이다. 1744 갑자년(甲子年)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였으나 소시(召試) 한권(翰圈)에 영조(英祖)가 고봉(高峯)의 후손(後孫)이라 하여 어필(御筆)로 한권(翰圈) 2점(點)을 특별(特別)히 더하니 이 한권이란 소시는 영조대 탕평책과 함께 시행되었던 것으로 임금이 인재의 선발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영조가 한권 2점을 과도하게 주어 후대하므로 소시(召試)를 거부(拒否)하였다. 이에 왕은(王恩)을 거부(拒否)했다는 명목(名目)으로 종성(鍾城)에 3년간(年間) 유배(流配)된 후(後) 헌납(獻納), 사간(司諫)을 지낸 뒤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1780년(正祖4)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除授)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問)에 매진(邁進)하였다. 국천유고(菊泉遺稿) 일권(一卷)이 있으며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유언(兪彦)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고 추산서원(秋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인물고(人物考), 세보(世譜)]

언정(彦鼎)
20세. 1716~1797. 자(字)는 국진(國鎭)이요 호(號)는 나와(懶窩) 또는 양익제(兩益齊)이며 시호(諡號)는 정간(靖簡)이다. 덕창군(德昌君) 정후(挺後)의 셋째 아들이며 학록(學祿)의 아버지이다. 1763 계미년(癸未年) 10월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771년 사간원의 정6품 정언(正言)이 되고, 1782년(정조 6) 당상관으로 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낸 후 종2품관에 올라 형조참판이 되었다.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해서 1786년 대사간에 발탁된 뒤, 세번이나 연달아 이를 역임하다가 1792년에는 대사헌에 취임하여 관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진력했다. 1795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하였는데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와집(懶窩集) 4권이 있고 용동사(龍洞祠)에 배향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인물고(人物考), 명신록(名臣錄), 광주읍지(光州邑誌), 세보(世譜)]

원봉(元鳳)
20세. 1750~1835. 자(字)는 봉익(鳳翼)이요 호(號)는 낙암(洛庵)이다. 순재(舜載)의 둘째 아들이요 선중(善中)의 아버지이다. 나이가 86세이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위(品位)를 받았으며 공(公)의 음덕(陰德)으로 자손(子孫)이 번영(繁榮)하였다.[세보(世譜)]

학경(學敬)
21세. 1741~1809. 자(字)는 중심(仲心)이요 호(號)는 겸재(謙齋)이다. 국천재(菊泉齋) 언관(彦觀)의 셋째 아들이며 진사(進士) 상이(象 )의 아버지이다.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1783 계묘년(癸卯年)에야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97년 문학사에 선임되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교정하였다. 1801 신유년(辛酉年)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승격되어 칠조소(七條疏)를 올렸다. 그뒤 무장현감(武長縣監)을 지내고 홍문관수찬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문집(文集)으로 겸재집 2권이 있다. [방목(榜目), 세보(世譜)]

상익(象益)
22세. 1757~1820. 통덕랑(通德郞) 학순(學淳)의 큰아들이고 통덕랑(通德郞) 학덕(學德)의 양자(養子)이요 통덕랑(通德郞) 제국(濟國)의 아버지이다. 음서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이요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이며 연기현감(燕岐縣監) 겸 공주진관(公州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세보(世譜)]

제국(濟國)
23세. 1779~1825. 자(字)는 군섭(君涉)이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상익(象益)의 큰아들이며 형수(馨秀)의 아버지이다. 학행(學行)이 널리 알려졌다. [광주읍지(光州邑誌), 세보(世譜)]

재선(在善)
23세. 1792~1837. 자(字)는 경지(敬止)요 호(號)는 입제(立齊)이다. 진사(進士) 태검(泰儉)의 아들이요 진사(進士) 봉진(鳳鎭)의 아버지이다. 1822 임오년(壬午年)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매진(邁進)하였다. 蘆沙 기정진(奇正鎭) 선생(先生)의 학문(學問)에 가장 많은 영향(影響)을 끼쳤으며 노사선생(蘆沙先生) 또한 입재종숙(立齋從叔)은 나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스승을 자처하지 않았으나 노사(蘆沙)를 비롯하여 조카 윤진(允鎭), 익진(益鎭), 기진(麒鎭), 아들 봉진(鳳鎭), 승지(承旨) 문현(文鉉) 그리고 사위 민기혁(閔麒爀), 김요겸(金堯謙) 등이 모두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했으며 모두 문과(文科) 혹은 생원(生員)이다. 입재집(立齋集) 1권(卷)이 있다. 병진보(丙辰譜)를 편수(編修)할 때 주재(主宰)하였다. 노사(蘆沙) 정진(正鎭)이 행장(行狀)을 짖고 승지(承旨) 조병헌(趙秉憲)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노사집(蘆沙集), 세보(世譜)]

정진(正鎭)
24세. 1798~1879. 처음 이름은 금사(金賜), 자(字)는 대중(大中)이요 호(號)는 노령(蘆嶺)의 아래 하사(下沙)에서 살았으므로 노사(蘆沙)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는 문간(文簡)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된 재우(在祐)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덕언(德彦)의 딸이며 만연(晩衍)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자질(資質)이 영수(英秀)하고 움직임이 신중(愼重)함으로 일반의 존경을 받았다. 7~8세에 이미 경서(經書)를 읽고 사기(史記)에 능통하였으며 독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1815년에 양친을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전북 순창(淳昌)에서 장성 하남(河南)으로 이사하여 장성에서 몇 차례 집을 옮기며 살았다. 1828년 향시에 응시하고, 1831 신묘년(辛卯年)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성이 조정에 알려져 183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이 주어졌고, 1835년에는 다시 현릉참봉(顯陵參奉)이 주어졌으며, 1837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옹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의를 표하였다. 1842년에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로 임명되자 취임 6일 만에 병이났다 핑개대고 사임하여 귀향하였다. 얼마 뒤 다시 평안도도사, 1857년에 무장현감, 1861년에 사헌부장령, 1864년 사헌부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했고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명배(命拜)하였으나 이것도 취임(就任)하지 않았다. 송대(宋代)의 철학자 주돈이(周敦燎), 장재(張載), 정이(程燎), 주희(朱熹) 등의 성리학을 독자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대성하였다. 유림계(儒林界)에서 성리학으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 등과 더불어 공(公)을 6대가(大家)로 칭(稱)한다. 그리고 선현(先賢) 학설에 이론을 말하는 학자는 사문란적(斯文亂賊)으로 몰았는데 공(公)은 전래(傳來)의 정주(程朱) 학설인 주리설(主理說)을 반복(反覆)하여 주기설(主氣說)을 주창(主唱)한 것이 유명한 기노사(奇蘆沙)의 외필(猥筆 ; 답문유취(答問類聚))이다. 이에 영남(嶺南) 유림(儒林)들은 일대반발을 일으키어 전국에 성토문(聲討文)을 돌리고 수백명이 창덕궁(昌德宮) 문앞에서 항소(抗疏)한 일까지 있었으나 40세 이후 공에게 경학을 공부하려는 선비들이 모여들었으며 노사의 학설을 호남에 뿌리 깊게 박혀 손자인 우만(宇萬)과 많은 제자들에게 전수되어 신진학자들은 위대한 학설로 숭배하여 오고 있다. 일화(逸話)로 공(公)이 9세 때에 책상을 보고 상위에 괴물(怪物)이 하나 있으니 바라보니 유절(有節)이요 어루만지니 무절(無節)이라 머리와 꼬리는 찬데 중심은 뜨겁다 하여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또 왕이 서울 사람 만명(萬名)의 안목(眼目)이 장성(長城)의 기모(奇某) 한사람 안목(眼目)만 못하다 한 것도 유명한 일이다. 면암(勉岩) 최익현(崔益鉉)이 공(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고 답문유취(答問類聚) 6권과 노사문집(蘆沙文集) 15권이 있으며 장성(長城) 고산사(高山祠)에 향사(享祠)하였다. [인물고(人物考) 등 여러문헌, 세보(世譜)]

문현(文鉉)
24세. 1811~1861. 자(字)는 우용(羽用)이요 호(號)는 송대(松臺)이다, 백연(百衍)의 아버지이다. 1844 갑진년(甲辰年)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기주관(記注官), 휘릉별검(徽陵別檢),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선전관겸금위영종사관(宣傳官兼禁衛營從事官), 충청도사(忠淸都事), 웅천현감(熊川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856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교리(校理)에 임명(任命)되었으며 185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었고 은산현감(殷山縣監)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에 다시 임명(任命)되었으며 1860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문집(文集)으로 송대유고(松臺遺稿)가 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백석헌집(柏石軒集), 방목(榜目), 세보(世譜)]

우현(禹鉉)
24세. 1814~1891. 자(字)는 명로(鳴魯)요 초명은 경현(慶鉉) 호(號)는 수졸당(守拙堂)이다. 정국(廷國)의 아들이요 동순(東純)의 아버지이다. 1850 경술년(庚戌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及第)하여 186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철종실록(哲宗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기진(麒鎭)
24세. 1830~1903. 자(字)는 원서(元瑞)요 호(號)는 삼석(三石)이다. 진사(進士) 재규(在奎)의 둘째 아들이요 징연(徵衍)의 아버지이다. 1844 갑자년(甲子年)에 1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가 되고 필법(筆法)이 유명하였다. [세보(世譜)]

관현(觀鉉)
24세. 1837~?. 자(字)는 대현(大現)이요 사철(師轍)의 큰아들이며 승연(昇衍)의 아버지이다. 1870 경오년(庚午年)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1869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任命)되어 사헌부정언(司憲府正言)을 역임(歷任)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방목(榜目), 세보(世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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