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력
1527(중종 22)∼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시호는 문헌(文憲)
광주(光州)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配享)
□ 대표 관직 : 성균관대사성, 대사간, 공조참의
□ 저 서 : 고봉집, 주자문록, 논사록, 사단칠정분이기왕복서 等
□ 생애와 활동사항
1549년(명종 4)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승문원부정자와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승정원 주서에 임명되었다.
1565년 병조좌랑·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
1567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을 거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 및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으며, 대사간·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병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던 도중에 고부(古阜)에서 객사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은 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세계철학사에서도 가장 훌륭한
학문논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헌공 고봉(高峰)으로 인하여 행주 기씨는 국반(國班)의
반열에 올랐으며, "高三峰不如奇一峰" 호남의 명가는 "奇,高,朴"이라는 말이 생겨나기까지
하였다.
고봉의 사상은 퇴계와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으로 유명하다.
사단은‘선한마음의 이성’을 가르키고 칠정은‘인간의 몬능적인 감정’을 말한다.
퇴계는 사단이 리(理)에서 발생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이기이원론(二氣二元論)을 주장하고 고봉은 理와 氣를 합해서 보는 이기일원론(二氣一元論)의
입장을 취하였다.
고봉의 주장은 9년 후배인 율곡 이이가 그 뒤를 잇고, 다산 정약용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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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선생연보(高峯先生年譜)
중종공희왕(中宗恭僖王) 22년명 세종(明世宗) 가정(嘉靖) 6년 정해(1527) 11월 18일
임진 진시(辰時)에 선생은 광주(光州) 소고룡리(召古龍里)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출생하였다.
- 선생의 본관은 행주(幸州)인데, 지금의 고양군(高陽郡)이다.
선세(先世)는 대대로 서울에서 거주했었는데, 물재공(勿齋公)이 아우 복재(服齋) 준(遵)과
함께 성리학을 전공하다가 복재공이 기묘년(1519, 중종14)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세속의 일을 단념하고 광주로 물러가 살았기 때문에 선생이 광주에서
출생한 것이다.
23년 무자(1528) 선생 2세
24년 기축(1529) 선생 3세
25년 경인(1530) 선생 4세
26년 신묘(1531) 선생 5세
27년 임진(1532) 선생 6세
선생은 어른처럼 후중하여 다른 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28년 계사(1533) 선생 7세
비로소 학업을 시작하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정좌하고 암송하여 읽기를 쉬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너무 열심히 하느라 힘들겠다고 위로라도 하면 “나는 이 공부가 좋아서 한다.”고
대답하였다.
29년 갑오(1534) 선생 8세
모친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상을 당하였는데, 어른처럼 애통해하였다.
- 조금 장성하자, 언제나 모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나이에 상례를 다하지 못했던 것을
한스럽게 여기면서 기일(忌日)이 되면 한 달 전부터 백의(白衣)를 입고 소찬(素饌)을 먹었다.
30년 을미(1535) 선생 9세
《효경(孝經)》을 읽었다. 손수 《효경》을 필사했는데 글자획이 해정(楷正)하였다.
- 맏형인 승지공(承旨公)이 교외에서 씨름[角牴戲]을 구경하였는데, 물재공(勿齋公)이
이 사실을 알고는 돌아오라고 불렀다. 그러자 승지공은 벌받을 것이 두려워서 피해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선생은 형의 손을 잡으며 만류하기를 “아버님께서 불러오라고 명하셨는데
형이 만약 피해 도망간다면, 이는 아버님을 더욱 노엽게 만드는 것이고 잘못도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붙들고 돌아왔다.
31년 병신(1536) 선생 10세
32년 정유(1537) 선생 11세
향숙(鄕塾)에 나아가 《대학장구(大學章句)》를 배웠는데, 학우들이 배우는 것까지 아울러
통달하였으며, 수학(數學)과 육갑(六甲)과 오행성쇠(五行盛衰)의 이치에도 정통하였다.
김공 집(金公緝)이 연구(聯句)로 ‘식(食)’ 자를 시제(詩題)로 내어 선생의 글짓는 것을
시험하자, 선생은 즉시 응하여 읊기를 “밥먹을 때에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이다.[食無求飽君子道]” 하였다.
이에 김공이 칭찬하기를 “너의 계부(季父)인 덕양 선생(德陽先生)이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사림의 영수가 되었는데, 너 또한 그 가업(家業)을 계승할 만하구나.” 하였다.
33년 무술(1538) 선생 12세
34년 기해(1539) 선생 13세
35년 경자(1540) 선생 14세
항상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애독하여 매일 《자치통감강목》 한 권씩을 다 읽었다.
36년 신축(1541) 선생 15세
선대인(先大人)의 훈계를 손수 기록하여 첩(帖)을 만들어 스스로 면려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가훈(家訓)을 받았으니, 지금쯤에는 거의 성취가 되었어야 하는데도 기질이 범상하여
어릴 때와 같이 어리석으니, 생각할수록 한스럽다.
지난날의 잘못은 어쩔 수 없거니와, 앞으로는 힘써 노력하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들으니,
소씨(邵氏)는 견문록(見聞錄)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니 배우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차기(箚記)를 써서 잊어버리는 것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은 것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완미(玩味)하고자 한다.” 하였다.
- 이때부터 자기를 위한 학문(爲己之學)에 전념하였고 세상 사람들이 하는 범위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이해 봄 서경부(西京賦) 1백 30구(句)를 지었다.
37년 임인(1542) 선생 16세
《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연구하였다.
38년 계묘(1543) 선생 17세
《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後漢書)》 및 《여지승람(輿地勝覽)》을 읽었다.
39년 갑진(1544) 선생 18세
중종(中宗)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림(哭臨)하고 소식(素食)하였다.
인종영정왕(仁宗榮靖王) 원년 명 세종 가정(嘉靖) 24년 을사(1545) 선생 19세
7월 인종이 승하하자, 중종이 승하했을 때와 같이 곡림하고 소식하였다.
사화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흘리며 두문불출하였다.
한편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 자경설은 문집 가운데에 보인다.
명종공헌왕(明宗恭憲王) 원년 명 세종 가정 25년 병오(1546) 선생 20세
가을 향시(鄕試)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여 2등으로 합격하였다.
2년 정미(1547) 선생 21세
정월에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였다.
3년 무신(1548) 선생 22세
부인 이씨(李氏)와 혼인하였다.
- 이씨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며, 참판 이종수(李從遂)의 증손이다.
4년 기유(1549) 선생 23세
사마양시(司馬兩試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2등을 하였다.
5년 경술(1550) 선생 24세
8월 10일 아들 효증(孝曾)이 출생하였다.
6년 신해(1551) 선생 25세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였다.
급제할 수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이름을 꺼려 하등의 점수를 주어 낙제하였다.
7년 임자(1552) 선생 26세
8년 계축(1553) 선생 27세
9년 갑인(1554) 선생 28세
동당 향시(東堂鄕試)에 응시하여 장원을 하였다.
○ 봄에 용산(龍山) 정공(鄭公 정즐(鄭騭))의 상(喪)에 조곡(弔哭)하였다.
10년 을묘(1555) 선생 29세
정월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하였는데, 3월에 집 뒤 경좌(庚坐)의 묘지에 장례하고
묘지(墓誌)를 지었다. 같은 달에 선비(先妣) 강씨(姜氏)의 묘를 옮겨 선고(先考)의 묘
오른쪽에 부장(祔葬)하고 천묘기(遷墓記)를 지었다.
11년 병진(1556) 선생 30세
12년 정사(1557) 선생 31세
3월에 복(服) 입는 것이 끝났다. 이달에 서석산(瑞石山)과 월출산(月出山)을 유람하였다.
○ 이해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이 완성되었다. - 정자(正字) 송정황(宋庭篁)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13년 무오(1558) 선생 32세
4월에 두류산(頭流山)을 유람하였다.
○ 7월에 하서(河西) 김공 인후(金公麟厚)를 배알하였다.
이달에 상경하였는데 태인(泰仁)을 지나는 길에 일재(一齋) 이공(李公 이항(李恒))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하여 논하였다.
○ 10월에 문과 을과(乙科)에 1등으로 합격하여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달에 퇴계 선생을 경저(京邸)에서 배알하였다.
○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보여 주니, 선생은 대강만을 간략하게
논하여 돌려보냈다.
○ 11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면서 다시 일재(一齋)를 배알하고는 전에 의논했던 것을
재차 논하다가 미처 끝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 선생이 일재에게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지난번 서로 강구할 때에는
각자의 주장이 서로 달랐습니다. 태극은 이(理)와 기(氣)를 겸한다고 말한 것은 선생의 요지였고,
저는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를 들어 태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태극’이라는 것은 다만 이(理)일 뿐이어서 기(氣)와는 관련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하루종일 갖가지로 반복해서 논쟁하였지만 그 요점은 이것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 상세한 내용은 왕복서(往復書)에 보인다.
14년 기미(1559) 선생 33세
3월 퇴계 선생에게 답서를 보냈다.
- 정월 5일 퇴계 선생이 보낸 편지는 대략 다음과 같다.
“사우(士友)들을 통하여 그대가 논박한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도 전부터 이에 대해 표현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스스로 느꼈었는데, 그대가 논박한 글을
얻어 보고는 더욱 엉성하고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즉시 고치기를 ‘사단이 발한 것은
순수한 이(理)이므로 불선(不善)함이 없고, 칠정(七情)이 발한 것은 기(氣)를 겸하고 있으므로
선도 있고 악도 있다.’ 하였는데, 이와 같이 표현하면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 이에 대해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삼가 선생께서 고치신 것을 살펴 보니 의심이 풀린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우선 이(理)ㆍ기(氣)에 대해서 분명하게 안 뒤에야 심(心)ㆍ성(性)ㆍ정(情)ㆍ의(意)의 뜻이
제대로 파악되어 사단ㆍ칠정을 분간하기가 어렵지 않게 된다고 여겨집니다.
후세에 여러 선생들의 의논이 자세하고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자사(子思)ㆍ맹자(孟子)ㆍ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말씀으로 질정(質正)해 보면 모두 의미가 달라, 이ㆍ기에 대해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저의 견해를 진술하여 선생께 질정을 받고자 하였으나 오랫동안 바쁘게 지내다 보니
미처 다시 살펴보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글로 나타내면 쉽게 착오가 생길까 염려되어
감히 못하였습니다.”
○ 상세한 내용은 왕복서에 보인다. 이달에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을 지었다.
- 내용은 사칠이기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에 보인다.
○ 8월에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출처(出處)와 거취(去就)의 의리에 대하여 논하였다.
-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올린 글의 대략에 “저는 성품이 본래 우활하여 세상과는 뜻이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은둔하려하나 형적(形迹)을 감추기 어렵고,
힘써 종사하려고 하면 심신(心身)이 모두 피곤합니다.
두 가지가 모두 힘들 바에는 차라리 세속을 떠나 저의 참된 뜻을 이루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또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뭇 사람들의 비웃음과
배척을 면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끝내는 몸을 위태롭게 하고 뜻을 억제당하는 데에 이르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하였다.
또 “처세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시 저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제 학문이 지극하다면 처세함에 있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 퇴계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공은 뛰어난 재기와 동량(棟樑)의 자질을
갖추었기에 출사하기 전부터 명망이 원근에 파다하였고, 출사하자마자 온 나라 사람들이
촉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도에 올라 막 출발하려는 참이며, 또 공은 나처럼 몸에 병도 있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물러나 은둔하려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공을 놓아주려 하겠습니까.” 하였고,
또 “공을 위해 계책을 생각해 보면, 출사하기 전에 일찍 그러한 뜻을 정했더라면 학문에
전념하여 도를 터득할 수 있었을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일세에 적치(赤幟)를 세워
동방(東方)의 끊어진 학문을 창도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미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을 구하였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물러나
뜻을 이루려고 하니, 일의 기미를 너무 늦게 본 것이 아니겠습니까. 공이 말한 ‘세속을 떠나
자신의 학문을 성취하려는 소원이 이미 마음속에 결정되었다.’는 것도 꼭 이루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보내신 글에 ‘처세하기가 어렵기는 하나 역시 자신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학문이 지극하다면 처세함에 있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은 참으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씀입니다.” 하였다.
또 “나는 늘 우리나라 선비들은 조금이라도 도의(道義)를 추구하려는 뜻을 둔 자가 있으면
대부분 세상의 화를 당하곤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는 땅이 좁고 사람들이
경박한 때문이기도 하나, 선비들 스스로 자신에 대한 계책이 미진해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말한 미진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학문이 지극하지 못하면서도 처신을
너무 높게 하며, 시세를 헤아리지도 않고 성급하게 세상을 경륜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패배를 불러들이는 이유입니다.
이는 큰 명망을 가지고 대사(大事)를 담당하는 자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공이 해야 할 도리는 너무 높게 처신하지 말고 성급하게 경륜하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 자세한 내용은 왕복서에 보인다.
15년 경신(1560) 선생 34세
3월에 글을 지어 하서(河西) 김공(金公)을 조문하였다.
- 이해 8월에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렸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하서 선생은 장성(長城)에 거주하셨기 때문에 제가 사는 곳과 단지 20여 리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했던 것은 바로 김 선생에게 의지해서 전에
공부하던 것을 다시 강론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김 선생이 정월 16일에 갑자기 병으로
별세하셨으니, 사도(斯道)의 불행이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는 오랫동안 그분과 서로 알고 지내셨으니, 그분의 부음을 듣고 필시 매우
애통해하셨을 것입니다.”
○ 퇴계 선생이 답서를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김하서와 성균관과 홍문관에서 함께 일하였는데, 그는 온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으며,
성격이 호방(豪放)하여 인간의 일에 구속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음 입문한 곳은 대부분
노장학(老莊學)이었으므로 중년에 시(詩)와 술에 빠져 나는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만년에는 우리 유학에 뜻을 두고 있다는 말을 들었으며, 근래에 그가 학문에 대해
논한 글을 구해 보니 그의 견식이 꽤 정밀하였습니다.
아마 그가 한가히 지내던 때에 이와 같이 터득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 자세한 내용은 왕복서에 보인다.
○ 5월에 서신으로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과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논하였다.
- 보낸 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퇴계 선생의 사칠변(四七辨)을 반복하여 말씀해서 많이 발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존장(尊丈)께서는 단지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근거하여 말씀하셨으니, 이는 반드시 퇴계 선생의 말씀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존장의 의견에 구차히 찬동하지 못하옵고 삼가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자어류》에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범연히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사이에는 참으로 곡절이 있어서였으니,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칠이기왕복서에 자세히 보인다.
○ 8월에 퇴계 선생에게 글을 올려 사단칠정에 대하여 논하였다.
- 퇴계 선생이 답서를 보냈는데, 그 대략에 “무오년(1588, 명종13) 도성에 들어간 것은
매우 낭패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은 그대를 만나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내려와 자취를 숨김으로 인해 다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으니 그리움만 간절하던 차에 마침 정자중(鄭子中)을 통해 사단칠정설을 전해 보고는
매우 기뻤습니다. 인하여 한 장의 편지를 써서 나의 간절한 심정을 대략 표하였고,
또한 사단칠정설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의문처가 있으므로 나의 견해를 대강 진술하여
정자중을 통해 바로잡아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대개 정직하고 신의있는 유익한 벗을 얻는 것은 몽매함을 일깨우는 처지에 있는 자로서
또한 반드시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매우 경솔한 감이 있습니다.
그후 한동안 생각해 보니 내가 주장하는 내용 중에 한두 군데 온당치 못한 부분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것을 고쳐야 할 것이나 아직 미처 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가을에 자중이 서울에서 귀향하면서 그대가 정추만(鄭秋巒)에게 보내 준 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글에는 나의 주장에 대해 논박한 것도 몇 조목 있었는데, 일부는 내가 이미
깨닫고 있던 것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글 끝에 ‘의당 조목조목 분석하여 답변하겠다.’고
했으므로, 나는 이때부터 그대의 글이 오기를 여러 날 동안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던 차에 천리 길에 사람을 시켜 글을 보내와 자상하게 가르침을 베풀어 주고, 함께 오류를
바로잡은 글 한 책을 보내 주셨는데, 증거를 들어 논변함이 지극히 자세하여 미혹을 지도해
주신 거룩한 염려가 남음없이 극진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그대가 지적한 것은 조목조목 분석하여 끝까지 지도해 주기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워낙 자질이 둔한 탓으로 문자와 의리에 있어 여러 날을 두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그대가 논한 것을 대략 보니, 광대 미묘하여 내 스스로 잘못되었다고 인정되는
‘선악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등의 조목 이외에는 너무 넓어 요령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매일 손님이 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또 서신을 가져온 사람이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도 없으므로, 지금 우선 대충 글을 지어 답하고, 이 변목(辨目)은 보류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논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 양 선생이 변론한 내용은 무려 수만 자나 되는데, 모두 사칠이기왕복서에 실려 있다.
16년 신유(1561) 선생 35세
9월에 아들 효민(孝閔)이 출생하였다.
17년 임술(1562) 선생 36세
5월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다.
휴가를 얻어 귀향하였다.
○ 12월에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 옮겼는데 겸직은 전과 같았다. 이달에 또 봉교(奉敎)로
옮겼는데, 임금의 소명(召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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