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幸州奇氏-◆

처음 만나 편지를 쓰기 시작

기영석 2006. 8. 27. 11:57
처음 만나 편지를 섞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 차는 스물여섯. 퇴계는 일가를 이룬 쉰여덟 살의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두 살의 신출내기 선비였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는 조선 중기를 살았던 퇴계 이황(1501~1570)과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이다. 기왕에 나와 있는 국역본이 국한문 어투인 데 반해, 이 책은 한글 세대들이 술술 읽을 수 있게 꼼꼼히 정갈한 우리말로 옮겨졌다. 편지 왕래는 과거에 급제한 기대승이 상경해서 퇴계를 처음 만나던 해인 명종 13년(1558년)부터 퇴계가 세상을 떠난 선조 3년(1570년)까지 16세기 후반 13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책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넘나들었던 조선의 두 지성의 교유의 기록이자 “바야흐로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깊은 곳까지 내면화되어가는 조선 중기 사람들”의 내면 풍경과 그들의 풍속, 철학적 논쟁의 기록이다. 이들의 편지는 관직에 있을 때는 서울에서 오갔지만, 주로 이황은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기대승은 전남 광주에서 절박한 심정과 논변들을 인편으로 부친 편지들을 통해서 토해냈다. 오늘날의 ‘정서’를 과거로 소급시키는 우를 범하면서 말한다면 이 책은 영호남 지식인(정치가)의 ‘정치적 연대’의 기록이라고도 할 만하다.



편지 왕래 13년 가운데 첫 8년 동안 벌어진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1175년 주희(주자)와 육상산의 역사적 논쟁조차도 여기에는 거의 비교될 수 없을 것”(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소장 뚜웨이밍 교수)이라고도 평가된다. 국사편찬위 편사연구사로 있는 옮긴이 김영두씨는 “한국 유학이 단순히 주자학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단계로 성장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우리는 고봉 기대승이라는 인물을 ‘참신한 지적 충격’ 속에서 만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 조선의 ‘두 지성’ 간에 벌어졌던 사단칠정 논쟁의 전말을 세세히 접한 바 없는 일반 독자라면, 이들의 편지가 패기방장한 청년 성리학도가 일가를 이룬 스승에게 물음을 구하고 답을 받는 방식이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편지 교류를 시작한 퇴계의 두번째 편지를 들여다보자. “그대의 (사단칠정론에 관한) 논박을 듣고 나서 더욱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인 까닭에 언제나 선하고 칠정의 발현은 기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렇게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기대승의 답신은 이렇다. “그렇게 고친다면 비록 지난번의 설보다는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제 의견으로는 그래도 불만스럽습니다.…무릇 이는 기의 주재자요, 기는 이의 재료입니다. 이들은 본래 구분이 있지만, 실제 사물에서는 완전히 섞여서 나눌 수 없습니다.…모름지기 이는 기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스스로 발현된 것이 이의 본래 모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행간에는 후학으로서 예가 극진하지만, 기대승은 자기 입장을 굳건히 세우고 논변을 이어간다. 반면 이황은 논리적으로 후학에게 밀리는 양상을 보여준다.



성리학에서는 만물(사물)을 ‘이’와 ‘기’로 설명하는데 이는 세상의 원리이고 기는 그 이치가 구현되는 물질적 실체라고 한다. 사단칠정(四端七情)론은 이와 기를 통해 인간의 마음(심성의 본질)을 설명하고자 하는 설이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에서 사단은 이가 발현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기대승은 이기이원론에 반대했다. 그는 인간 감정을 연원에 따라 갈라놓기보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퇴계가 사물의 본질을 분별하고 나누어 도식화시켰다면, 고봉은 사물의 본질을 역동적이고 통일적으로 바라본 셈이다.

그렇지만 기대승의 관직 생활은 파란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신진 사류의 주동자(영수)로 지목되어 훈구파에 의해 파직당하는가 하면 조광조 등 ‘사화’로 희생된 사림의 복권을 역설하는 등 그의 “기개는 너무나 강경하고 주장은 예리했”다. 이황은 이를 염려해 “세상을 일구는 데 너무 용감하지 않을 것”을 타이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기대승은 퇴계가 타계한 지 이태 만에 마흔여섯의 이른 나이에 객사했다.

이 책에서 “삼가 절하고 적습니다”(기대승)라든가 “황이 머리 숙입니다”(이황) 따위의 당시 편지글의 예의를 접하는 것도 흥미롭다. 편지의 내용도 ‘둘째 아이가 죽었음을 알립니다’(고봉)처럼 각기 자신의 일신상의 괴로움 토로에서부터, 사화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당시 분위기 속에서 목숨을 운위할 만큼 정치 상황에 대한 절박한 의견 교환, 왕실의 의례 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예컨대 이황은 기대승이 조정에서 이황의 중용을 주장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우리 두 사람 사이는 뻔질나게 오가며 서로를 좇는 것이 이미 별나게 여겨지고 있는데, 누가 그대의 말을 공정하다고 믿겠습니까” 하고 질책한다.

이들의 편지에는 상례, 제례에 관한 의견교환도 다수 들어 있다. 퇴계와 고봉은 당시 맏며느리(남편을 잃은)가 제사를 주재하는 일반의 세태에 반대하는가 하면 조상 제사를 자손에게 전해 이을 때 부계(父系)로만 해야 된다는 확고한 주장을 서로 확인하고 가다듬는다.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 들어 ‘남존여비’사상이 심화한 것은, 일반의 세태와 풍속마저도 철저하게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개조하려 했던 이들 남성 성리학자들의 ‘지난한 노력’이 있었음이다


출처 : 한겨레신문, 2003년 2월15일자, 허미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