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幸州奇氏-◆

선세업적

기영석 2008. 2. 9. 14:50
우성(友誠)
득성시조(得姓始祖). 기원전 30년경에 사신분. 마한(馬韓) 원왕(元王) 기훈(箕勳)의 아들로 태어나 비로소 기씨(奇氏)로 성(姓)을 얻고 행주(幸州)에 세거(世居)하였으므로 후손(后孫)들은 행주(幸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왔다, 벼슬은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때에 시중(侍中)이었다.[만성보(萬姓譜), 명신록(名臣錄), 세보(世譜)]

언(彦)
936년경에 사신분. 언(彦)은 언(言)의 뜻이다. 장군(將軍)이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일리천(一利川)에서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과 대진(對陣)할 때 공(公)에게는 군사 3만을 주어 좌익(左翼)을 맡게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에는 기록없음]

정업(貞業)
998년경에 사신분. 고려(高麗) 목종(穆宗) 때의 명의(名醫)로 전의(典醫)가 되었으며 목종(穆宗)이 병이 났을 때에는 왕사(王師)인 승려 두 명과 같이 밤낮으로 간호(看護) 시약(施藥)을 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는 기록없음]

순우(純祐)
1세. 1123년경에 사신분. 중시조(中始祖). 문유(文儒)의 아들이요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守太師) 수전(守全)의 아버지이다.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에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세보(世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수전(守全)
2세. 1160년경에 사신분.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순우(純祐)의 아들이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아버지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고조(高祖)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다. 구양현(歐陽玄)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비(碑)에는 추밀부사(樞密副使)라고 하였다.[세보(世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윤위(允偉)
3세. 1217년경에 사신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아들이요,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형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상장군(上將軍)이다. 1211년(희종 7) 왕이 근신 왕준명 우승경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죽이려 할 때 당시 지유로서 신선주 등과 더불어 최충헌을 구출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다. 1217 고종4년 이장대(李將大), 이당필(李唐必) 등이 반란한 잔당을 본령군(本領軍)과 신기(神騎) 2반을 거느리고 이를 소탕했고 이어서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을 때 장군으로 개경시가에 군사를 배치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하였으며 거란(契丹)이 고주(高州 :함남 고원)와 화주(和州 ;함남 영흥)에 침입할때는 대장군으로, 가발병마사(加發兵馬使)가 되어 출정하여 격퇴하였다. 그러나 군사개편으로 오군과 가발병을 폐지하고 삼군을 설치함에 따라 가발병마사의 지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아들이 없어 사위 재신(宰臣) 손정렬(孫廷烈)이 가계(家系)를 계승(繼承)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병감(東國兵鑑), 세보(世譜)]

윤숙(允肅)
3세. ?~1257 고종 44년.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둘째 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증조부(曾祖父)이며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의 고조(高祖)이며, 시호(諡號)는 강정(康靖)이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주국판리부사(上柱國判吏部事)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글에서 공(公)이 의종(毅宗), 명종(明宗), 신종(神宗) 3대 영상(領相)으로 40년간의 영화(榮華)를 향락(享樂)하고 의종(毅宗) 말기(末期)에 권신(權臣) 정중부(鄭仲夫)가 왕을 마음대로 몰아내고, 세우고 중신(重臣)들을 함부로 주륙(誅戮)하는 작난(作亂)을 조용히 설득하여 왕정(王政)을 복귀(復歸)시킨 공(功)이 크다고 하였다.[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필선(弼善)
3세. 1230년경에 사신분. 수태사시랑(守太師侍郞) 수전(守全)의 셋째 아들이요 상장군(上將軍) 겸(謙)의 아버지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세보(世譜)]

탁성(卓誠)
?~1179(명종 9년). 용모(容貌)가 미려(美麗)하고 사어(射御)와 마술(馬術)을 특히 잘하였다. 교위(校尉)가 되었을 때 말달리기와 격구(擊毬)를 즐겨하는 의종(毅宗)에게 뽑혀 견룡(牽龍:御駕牽引)이 되어 언제나 왕의 측근에서 권신들과 잘 교유(交遊)하였으며 위장군(衛將軍)으로 여러 차례 추천되어 명종(明宗) 초기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174년에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켜 형세(形勢)가 강대(强大)할 때 부원수(副元帥)로 이를 토멸(討滅)하고 개선(凱旋)하니 그 전공(戰功)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판리부사(判吏部事)에 올랐다. 1179 명종(明宗) 9년에 마침 광평궁(廣平宮)이 오래 폐하여 주인이 없었으므로, 왕에게 청하여 광평궁에 거처하려 하였다. 부인이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고 궁에 거처하기 수개월 만에 돌아가시니 왕은 조위총을 토멸한 전공을 논(論)하여 수태사문하시중(守太師門下侍中)을 추증(追贈)하고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이 되어 각상(閣上)에 형상이 그려졌다. [고려사(高麗史) 기탁성(奇卓誠) 본전(本傳),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존정(存靖)
1215년경에 사신분.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장군(將軍)이다. 1216 고종 3년에 거란의 대군이 고려의 국경선을 침범하여 영덕성(寧德城:평안북도 영변)을 넘어 연주(延州)의 개평역(開平驛), 원림역(原林驛)에 주둔하였다, 고려의 삼군(三軍)도 이곳에 이르렀으나 거란의 기세에 눌려 감히 나아가지 못할 때 공은 장군으로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와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포위를 돌파하여 거란군을 크게 물리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인보(仁甫)
?~1219.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의 무인(武人)이다. 공(公)은 랑장(郞將)으로 원수(元帥) 조충(趙?)과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를 따라 거란의 침입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막았다, 최충헌(崔忠獻)이 정권(政權)을 잡고 횡포(橫暴)를 부리고 그를 책망하는 백여명(百餘名)을 무단(無端) 살륙(殺戮)함으로 이에 분격(憤激)하여 최충헌(崔忠獻)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발각되어 피살(被殺)되었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에 기록없음]

홍수(洪壽)
4세. 1148~1209. 자(字)는 태고(太古)요, 시호(諡號)는 경의(景懿)이다. 강정공(康靖公) 윤숙(允肅)의 큰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할아버지 홍영(洪穎)의 형이다. 어려서부터 명필(名筆)이자 문장(文章)에도 능(能)하였으며 고려(高麗)의 명종(明宗), 신종(神宗), 희종(熙宗) 3조(朝)에 걸쳐 무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벼슬은 1194년(명종 24)12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97년 9월에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 같은해 11월에 수사도 중서시랑 평장사감수국사 판병부사 태자태부(守司徒中書侍郎平章事監修國史判兵部事太子太傅)가 되었다. 1199년(신종 2) 12월에 수태위 문하시랑 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平章事), 1200년 12월에 수태사 주국(守太師柱國), 1201년 12월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를 거쳐 1203년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로 물러났다. 1199년 5월에 대관전무일편(大觀殿無逸篇)을 고쳐 썼으니 이는 고려시대(高麗時代) 최고(最高)의 서예작품(書藝作品)으로 평가(平價)되었다, 1204년 1월에 최충헌(崔忠獻) 등과 더불어 신종의 희종에게의 선위(禪位)를 논의하였고, 희종 때에 이부(吏部)에서 전선(銓選)을 맡았으나, 최충헌에게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가야금과 시를 즐겼고 서예(書藝)로 기쁨을 삼았다. 나이 62세이고 고양읍지(高陽邑誌)에는 행주(幸州)는 공(公)의 옛터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양읍지(高陽邑誌),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세보(世譜)]

홍영(洪穎)
4세. 1240년경 사신분. 수태전시랑(守太傳侍郞) 윤숙(允肅)의 둘째 아들이요, 삼사우사(三司右使) 관(琯)의 아버지이고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할아버지이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에 좌우위 보승낭장(左右衛 保承郎將)을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공(公)의 부인은 공예왕태후(恭叡王太后)의 동생이다. 원나라에서 기황후(奇皇后)가 고귀(高貴)한 사람이 되어 왕이름은 알수 없지만 왕으로 추증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홍석(洪碩)
4세. 1240년경 사신분.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수태사(守太師) 윤숙(允肅)의 셋째 아들이다,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 말기(末期)인 고종(高宗) 때 지유(指諭)로 있으면서 장군 유정, 지유 민경함 등과 함께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이 죽자 최우의 외손자 김미를 최우의 아들로 삼아 후계자로 하기를 청하였다. 뒤에 김미가 최우의 서자 최항과 권력다툼을 하여 최항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자 유정, 민경함 등과 함께 최항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러나 1258년(고종 45) 최씨정권이 몰락함에 풀려나와 1275년(충렬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에 제수(除授)되었고 1278년에는 정동도원수 홍다구의 추천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르고 다시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감찰제헌(監察提憲)으로 국가기무(國家機務)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광정대부(光靖大夫)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司)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보(世譜)]

겸(謙)
4세. 1250년경에 사신분. 처음 이름은 양(亮)이다. 상장군(上將軍) 필선(弼善)의 아들이요, 판각문하사(判閣門下事) 절(節)의 아버지이다.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셨다

온(蘊)
5세. 1270년경에 사신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홍영(洪穎)의 큰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큰아버지이며 고려(高麗) 고종(高宗)의 부마(駙馬)이다. 벼슬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동지추밀사(同知樞密使)로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

관(琯)
5세. 1270년경에 사신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홍영(洪穎)의 둘째 아들이요, 영안왕(榮安王) 자오(子敖)의 아버지이다. 처음이름은 장(璋)이나 고려 충선왕과 이름이 같아서 이름을 바꾸었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삼사우사(三司右使) 응양군(鷹陽軍) 상장군(上將軍)에 이르렀다. 원(元)나라에서 기황후(奇皇后)가 고귀(高貴)한 사람이 되어 왕이름은 알수 없지만 왕으로 추봉(追封)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세보(世譜)]

절(節)
5세. 1270년 경에 사신분. 상장군(上將軍) 겸(謙)의 아들이요, 문하시랑(門下侍郞) 판각하사(判閣下事) 효순(孝順)의 아버지이다. 벼슬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판각문하사(判閣門下事)에 이르렀다. [세보(世譜)]

자오(子敖)
6세. 1266~1328. 자(字)는 자오(子敖)이고 시호는 장헌(莊獻)이며 삼사우사(三司右使) 관(琯)의 아들이요 대사도(大司徒) 철(轍)과 기황후(奇皇后)의 아버지이다. 고려(高麗)에서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을 거쳐 총부산랑(摠府散郞)을 배(拜)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정승(僉議政丞)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추증(追贈)하였고 원(元)나라에서는 병덕승화육경공신(秉德承和毓慶功臣)으로 영안왕(榮安王)을 봉(封)하였다가 다시 경왕(敬王)으로 올려 추봉(追封)하였다. 1290 경인년(庚寅年)에 원(元)나라에서 반란한 무리인, 내안(乃顔)의 당(黨), 합단(哈丹)이 그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여 형세가 위급함에 충렬왕(忠烈王)이 왕비와 백관(百官)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란을 하였는데 중군편장(中軍偏將)으로 이를 퇴치(退治)한 공(功)이 컸다. 공(公)은 현사대부(賢士大夫)와 같이 종유(從遊)하고 재물(財物)을 몰랐다.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행장(行狀)을 짖고 구양현(歐陽玄)이 비문(碑文)을 지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지은 영안왕(榮安王) 행장(行狀), 세보(世譜)]

효순(孝順)
6세. 고려 때 문하시랑판각하사(門下侍郞判閣下事)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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