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기(箕子朝鮮記)
흘달 단군(5431-BC1767)이 신지(臣智) 양(亮)을 보내어 은(殷)나라 탕(湯)왕을 도와, 하(夏)나라 걸(桀)왕을 벌하고, 하나라의 빈,기땅을 점령하였다. 이에 백성을 옮기어 그곳에 살게 하였는데, 수유(須臾)족이라 하였다.
후에 태곡(太谷)에 거주하던 수유족의 일파가 은나라에 의해 기(箕)라는 작호를 받아 그 우두머리를 기자(箕子)라 하였다. 그 후손 중에 서우여(徐于餘)가 있었는데, 21대 단군 소태가, 그에게 단군을 양위하려 하였으나, 색불루가 이에 반란하여 힘으로써 도읍에 들어가 스스로 단군의 자리에 오르고, 서우여를 폐하였다. 이에 서우여가 좌원(坐原)에서 일어나, 색불루에 저항하자, 색불루가 번한(番韓)을 하사하니, 이에 굴복하고, 30대 번한으로 등극하였다. 이때가 환기 5913년(BC1285)이다.
60년간 번한왕에 계시다, 승하하시니, 5973년(BC1225)이다. 그러나, 수유족 서여(胥餘)가 번한을 잇지 못하고, 다음해에 아락(阿洛)이 번한에 즉위하자, 수유족은 잠시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서우여의 후손들이 그 대를 이어... 서여(胥餘) - 송(松) - 순(詢) - 백(伯) - 춘(椿) - 예(禮) - 장(莊) - 착(捉)- 조(調) - 색(索) - 사(師) - 염(炎) - 월(越) - 직(職) - 우(優) - 목(穆) - 평(平) - 궐(闕) - ?(낙성왕) - 존(存) - 효(孝) - 양(襄) - 통(通) - 참(參) - 근(僅) - 상(翔) - 여(黎) - 강(岡) - 혼(混) - 벽(璧) - 징(澄) - 준(雋) - 위(謂) - 하(賀) - 화(華) 로 이어지니, 서우여 이후 35대를 이었다.
화(華)의 뒤를 이어 후(珝-王자 대신 言자)가 서니, 이때가 6856년(BC342)이다. 번한 68대 수한(水韓) 2년(BC339) 연(燕)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 오니, 후가 무리를 이끌고, 들어와 연나라를 쳐부셨다. 이에 수한이 영지를 내리어, 후가 받들으니, 기자 조선의 시작이다.
3대 기석(箕釋) - 번조선 71대 1년(6908-BC290) 즉위 원년이다.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10년(6917-BC281)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介)가 공격해 들어오니, 막아 싸워지만, 패하여 서쪽 천리의 땅을 잃어버렸다. 이에 연이 이곳에 5군을 설치하니,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이다. 이에 연과 만번한을 국경선으로 삼았다. 15년(BC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40년 기석이 승하하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다.
4대 기윤(箕潤) - 번조선 72대 1년(6947-BC251) 즉위 원년이다. 20년 기윤이 승하하자 기비가 즉위하였다. (기윤과 기비의 계승관계에는 문제 있어 보인다. 번한세가나 기자조선세계에 의하면, 부자관계이지만, 단군세기 고열가편을 보면, "종실 대해모수(大解慕漱)가 은밀히 수유(須臾)와 짜고 옛 도읍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천왕랑(天王郞)이라 하니 사방 국경 안이 모두 그 명령을 들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봉하였는데 수유후(須臾候) 기비(箕丕)를 승진시켜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삼고 가서 상·하(上下)운장(雲障)을 지키게 하니 대개 북부여(北夫餘)가 일어난 것이 여기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 이 기사로 추정하건데, 기윤과 기비는 계승관계가 아니다. 기비는 기존의 단군조선의 번한인 기윤을 몰아내고, 해모수의 부여건국(BC239)에 힘을 실어준 대가로, 그 7년후 수유후에서 번한왕으로 등극한 것이다.)
5대 기비(箕丕) - 번조선 73대 1년(6966-BC232) 즉위 원년이다. 12년 기비가 승하하자 아들 기준이 즉위했다.
6대 기준(箕準) - 번조선 74대 1년(6977-BC221) 즉위 원년이다. 28년(7004-BC194)년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니, 번조선은 망하게 되었다. 기준이 위만에게 왕을 빼앗기자, 그 무리를 이끌고, 배를 타고, 황해도 마한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니, 이를 기씨 마한이라 하고, 또한 금마(金馬)라 하였다.
아래 내용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일부 족보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므로 참고로 보시면 됩니다.
중국 은나라 말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단군조선에 이어 건국하였다고 하는 나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표적인 역사책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尙書大傳)', 사마천의 '사기(史記)', 반고의 '한서(漢書)' 등인데, 사서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 밖의 기자에 관한 기록들은 모두 이들 세 사서에 그 유래와 근거를 두고 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망시키고 감옥에 갇힌 기자를 석방하자, 그는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달아났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주의 책봉(冊封)을 받은 기자는 부득이 신하의 예를 차려야 하였으므로 BC 1100년경(무왕 13)에 주나라에 가서 무왕을 만났는데, 무왕은 그에게 홍범9주(洪範九疇)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또, 《사기》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는 무왕이 은을 정복한 뒤 기자를 방문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묻자 홍범9주를 지어 바쳤다. 이에 무왕이 그를 조선왕으로 봉해주었으나, 기자는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한서》의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는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먼저 기자조선을 고조선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지배세력, 즉 한씨조선(韓氏朝鮮)의 등장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 견해가 있었다.
즉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씨가 아니라 한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기자를 한씨의 먼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성인을 자기의 조상으로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기 위함이었으며, 특히 기자릉(箕子陵. 고려 숙종때 평양에 축조)이나 기자묘(箕子墓)가 생기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의 사대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 1970년대에는 한국 민족의 기원을 종족이동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기자조선의 실체를 재조명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동이족의 일파인 기자족이 화북방면에 있다가 은주교체기(殷周交替期)와 춘추전국(春秋戰國)과 같은 격동기에 북중국, 남만주, 평양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기존의 사료를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한 점에서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내용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하지는 못하였다.
한편 기자는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고 '기국(箕國)의 제후'를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주나라 초기의 제후국으로서 '기국'이 보이며,
《국어(國語)》에는 기국을 정복한 진(晋)나라 고대의 성씨에 기씨(箕氏)가 있다는 사실이 전한다.
또한 기후(箕侯)를 중심으로 한 기씨 일족이 주(周) 초기에 북방의 정복활동에 종사하다가 뒤에 산시(山西)에서 산둥(山東)으로 이봉(移封)되었다는 기록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기국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후(箕侯)' '기(箕)' '기후방정(箕侯方鼎)' 등의 명문이 새겨진 은나라, 주나라의 청동기가 중국 각지에서 출토되는 것도 그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유력한 증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 견해는 기국(箕國)이 기자조선을 말하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기자조선과 고조선은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위의 견해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는 현재로서 명확한 답을 줄 수 없다. 다만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기자동래설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더라도 자료의 해석방향에 따라 그것이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는 측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기자조선에 관한 자료는 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실제로 은주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이동하여 왔는데, 기자동래설은 바로 이같은 주민이동과 그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변동과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다. 더욱이 기자동래설을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자묘를 세우고 국가 차원에서 숭배하였다는 점에서도 기자조선 문제는 한국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고 볼 수 없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기자조선의 부정론
기자조선이 부정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서기전 3세기 이전의 사서(논어, 죽서기년)에 기자는 수록되어 있으나 조선으로 갔다는 내용은 없다는 점.
- 황하 문명의 청동기와 요서 동쪽의 청동기가 크게 다르다는 점.
- 은나라 사람인 기자가 고조선에 예의와 문화를 전했다고 하는데, 고조선의 영토로 추정되는 영역에서 은나라에서 출토된 갑골문자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 중국 진나라의 두여(杜여)는 기자의 무덤이 중국 하남성 몽현(蒙懸)에 있다고 하였다.[1] 기자의 묘라고 전해지는 묘가 중국에 있다.
- 고려의 통치자들은 1102년(숙종 7년)에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고 사당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평양 토산(금수산 모란봉의 한 지맥)에 있던 '기자묘'는 이렇게 생겨난 것이었는데 1950년대 북조선 학자들이 발굴해보니 사기조각 몇개밖에 나온 것이 없었다.[2]
[편집] 기자조선의 긍정론
제시된 기자조선에 대한 증거는 다음과 같다.
- 고조선의 역사를 설명한 고려시대 이전의 유일한 사서인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세워져 약 1500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주나라의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전하는 유일한 사료인 규원사화는 단군조선이 1195년간(실제로는 1205년) 지속되었다고 기술하여 기원전 1126년 기자조선이 세워졌을 개연성을 뒷받침해준다. 중국의 기록으로는 기원전 12세기에 해당된다.
-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조선 시대에는 41대 1천 년 간의 기자조선의 존재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학자들이 기자조선을 연구했으며, 세조 때에 편찬된 동국통감, 영조 때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등 거의 모든 사서에 기자조선의 내용이 기록되었다.
- 중국과 만주의 나라들이 모두 기자조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서 매년 기자가한(箕子可汗)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곳곳에 기자조선의 풍습을 설명하고 있다.
- 기자가 이동한 경로에 해당되는 발해만 북쪽에서 해당 시대의 '기(箕)'자 명문이 새겨진 그릇을 비롯한 다양한 제사용 그릇들이 발굴되었다.
- 은나라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이 시기에 요서 지방에 정착되었고, 요동, 만주 일대로 전달, 발전되었다.
[편집] 기자조선의 역년 및 치세
[편집] 관련 사서
[편집] 연표
太祖 |
文聖大王 |
太祖文聖大王箕子姓子氏諱須臾又諱胥餘商帝武乙次子諱理子也誕降于帝乙十七祀丙戌五十四祀周武王己卯痛深革殷志堅罔僕逐東出朝鮮都平壤國號後朝鮮敎民八條變夷爲夏周成王戊午薨在位四十四壽九十三墓平壤城北王荇山負子原俗稱兎山三十六世嘉德王追尊爲王 |
2世 |
莊惠王 |
諱松周成王三十四年己未立在位二十五年諱中封於于其子孫在鮮在于者食其二國因姓鮮于 |
3世 |
敬孝王 |
諱詢康王二十二年甲申立在位二十七年 |
4世 |
恭貞王 |
諱佰昭王二十三年辛亥立在位三十年 |
5世 |
文武王 |
諱椿穆王二年辛巳立在位二十八年 |
6世 |
太原王 |
諱禮穆王三十年己酉立在位五年 |
7世 |
景昌王 |
諱莊穆王三十五年癸丑立在位十一年 |
8世 |
興平王 |
諱捉穆王四十五年甲子立在位十四年 |
9世 |
哲威王 |
諱調共王四年戊寅立在位十八年 |
10世 |
宣惠王 |
諱索懿王十四年丙申立在位二十九年 |
11世 |
誼襄王 |
諱師孝王十四年乙丑立在位五十三年 |
12世 |
文惠王 |
諱炎礪王三十六年戊午立在位五十年 |
13世 |
盛德王 |
諱越宣王三十五年戊申立在位十五年 |
14世 |
悼懷王 |
諱職幽王四年癸亥立在位二年 |
15世 |
文烈王 |
諱優幽王六年乙丑立在位十五年 |
16世 |
昌國王 |
諱睦平王十年庚辰立在位十三年 |
17世 |
武成王 |
諱平平王二十三年癸巳立在位二十六年 |
18世 |
貞敬王 |
諱闕平王四十九年己未立在位十九年 |
19世 |
樂成王 |
諱懷桓王十七年戊寅立在位二十八年 |
20世 |
孝宗王 |
諱存惠王二年丙午立在位十七年 |
21世 |
天老王 |
諱孝惠王十九年癸亥立在位二十四年 |
22世 |
修道王 |
諱立襄惠王十八年丁亥立在位十九年 |
23世 |
徽襄王 |
諱通頃王四年丙午立在位二十一年 |
24世 |
奉日王 |
諱參定王三十年丁卯立在位十六年 |
25世 |
德昌王 |
諱僅簡王八年癸未立在位十八年 |
26世 |
壽聖王 |
諱翔一云商靈王十二年辛丑立在位四十一年 |
27世 |
英傑王 |
諱藜敬王七年戊午立在位十六年 |
28世 |
逸民王 |
諱岡敬王十七年戊午立在位十七年 |
29世 |
濟世王 |
諱混敬王五十四年乙卯立在位二十二年 |
30世 |
淸國王 |
諱璧貞定王五年丙子立在位三十三年 |
31世 |
導國王 |
諱澄考王十年乙酉立在位十九年 |
32世 |
革聖王 |
諱?威烈王十三年戊辰立在位二十八年 |
33世 |
和羅王 |
諱謂安王十七年丙申立在位十六年 |
34世 |
說文王 |
諱賀烈王七年壬子立在位八年 |
35世 |
慶順王 |
諱華顯王八年庚申立在位十九年 |
36世 |
嘉德王 |
諱후(言+羽)顯王二十七年己卯立在位二十七年 |
37世 |
三老王 |
諱오(火+吳)愼睛王六年丙午立在位二十五年 |
38世 |
顯文王 |
諱釋赫王二十五年辛未立在位三十九年 |
39世 |
章平王 |
諱潤東周君五年庚戌立在位十九年 |
40世 |
宗統王 |
諱丕初諱恤秦王政十五年己巳立在位十二年 |
41世 |
哀 王 |
諱準輿地勝覽云武康王始皇二十七年辛巳立漢惠帝元年丁未燕人衛滿來侵率左右宮人浮海南出立國金馬郡今益山開國號曰馬韓在平壤爲王二十七年自箕聖東渡己卯後凡四十日世歷年爲九百二十九年 |
한국의 성씨 가운데 하나인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에도 기자조선 41대 임금과 마한 9대 왕위를 이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기자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
행주 기(奇)씨 , 서(徐)씨 , 태원 선우(鮮于)씨 , 청주 한(韓)씨 ,
[ 기자와 같이온 성씨 ]
해주, 태인 경(景)씨 , 토산 궁(弓)씨 , 봉화 금(琴)씨 , 밀양, 함평 노씨(魯)
청주한씨 족보싸이트
자료출처 : http://www.rootsinfo.co.kr/history/king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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