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가 살던 서화(西華)까지가 조선의 경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1) 서여(胥餘)가 살던 기(箕)가 서화(西華)가 된것은 정책에 의해서 - 사상조어(思想造語) 법칙 기자는 조선(고조선)과 주의 경계에 있던 동이 조선땅 기(箕)에 살던 서여(胥餘)를 이르는 말인데 존칭하여 자(子)를 붙여 기자(箕子)라고 하고 있으며 그가 살던 곳과 묻힌 곳을 밝혀야 조선(고조선)의 범위를 알 수 있으며 삼국의 활동강역을 규명할 수 있다. 아직까지 우리가 기자를 우리역사에서 삽입 삭제를 반복하는 것은 그가 남북한 지역에 왔는가 아닌가를 가지고 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으나 사서에서는 기자는 중국 하남성 기(箕)땅(서화)에서 살다가 중국 안휘성 "몽성"에 묻혀 있다고만 되어 있다. 기자가 활동하던 곳까지 밝히지 못하면 우리민족의 강역을 밝힐 수 없다. 바로 기자가 살던 땅의 이름이 기(箕)인데 변경되어 “서화”가 되었으니 이곳을 찾고 이곳까지 연결되는 우리역사무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지명은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후 땅에 붙여 준 이름이다. 유명인의 이름을 따기도 하고 자연의 특징을 살펴서 짓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통치를 하는 사람들의 의향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고 의미를 심어 주기 위해서도 바뀌는 경우가 있다. 남북한 지역에도 그러한 곳이 있으나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역사 기록에서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중에서 바뀐 것이 있다. 『구당서, 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시대 고구려 국민에게 기자신(箕子神)이라고까지 존경의 대상이 된 분이 있었으니 바로 기자(箕子)이다. (기자의 묘가 있는 것은 안휘성 몽성이고 살았던 땅은 하남성 서화이었다) -> 운영자 주) 이러한 기록이 있는지를 아는지 모르지만 대륙(하북성, 산동성)이 고조선의 주강역임을 모르니 한반도 상황과 맞지 않다고 “기자조선”을 인정했다가 부정했다가 하는 등 갈피를 못잡고 있다 중국 정사인 『사기』에서 기자의 묘는 안휘성 몽성(蒙城)에 있다고 하였고 (梁國蒙縣有箕子塚 - 史記 권30), (양국몽현유기자총 - 사기 권30), (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 - 수경주 권23) (두예왈양국몽현북유박벌성성내유성탕총기서유기자총 - 수경주 권23) 기자가 살았던 땅은 하남성 서화(西華)라고 하였다 (西華故箕地在開封府西九十里初聖師食宋箕故稱箕子今邑中有箕子台 - 『大淸一統志』172) (서화고기지재개봉부서구십리초성사식송기고칭기자금읍중유기자태 - 『대청일통지』172) 그러나 서화는 처음부터 그 지방의 이름이 아니라 기자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기(箕)라 불렀다고 한다. 언제 어느때 “기”라는 명칭이 서화로 왜 바꾸게 되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사기』에서 『대청일통지』까지 살펴보기로 하자. "서화의 옛이름은 “기”였는데 개봉부 서쪽 90리 지역에 있다." 서화는 현재 하남성에 있는데 그 이전의 이름이 “기”였는데 어떻게 서화로 바뀌었는가? ㉠ 기자는 조선땅에 살았다. -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 (史記 권38) - 어시무왕내봉기자어조선 (사기 권38) - 殷道衰箕子去之朝鮮 (漢書권28) - 은도쇠기자거지조선 (한서권28) - 武王封箕子於朝鮮 (後漢書 권85) - 무왕봉기자어조선 (후한서 권85) - 箕子旣適朝鮮 (三國志 권30) - 기자기적조선 (삼국지 권30) ㉡ 기자가 살던 땅은 기이다. - 箕子者箕國名也子爵也紂親戚也箕子名胥餘, 梁國蒙縣有箕子塚 (史記권30) - 기자자기국명야자작야주친척야기자명서여, 양국몽현유기자총 (사기권30) - 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수경주 권23) - 두예왈양국몽현북유박벌성성내유성탕총기서유기자총(수경주 권23) ㉢ 기(箕)는 조선 땅이다. “기“라는 지명을 존재시킬 때 후인들이 조선땅이 시각적으로 노출이 되는 것이 중화민에게는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를 “서화”로 바꾸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변경시켰을까 ? 기자의 본명은 서여(胥餘)이었는데 기(箕) 땅에 살았던 대사상가이기 때문에 “기자”라고 불렀다고 보여지는데 살던 땅 명칭이 변경되어 있다. 지나족(한부족)으로 역사를 정립하기 시작한 것은 장안을 중심으로 국가를 세웠던 한(漢)이었다. 한은 장안을 중심으로 국가를 형성하였던 주, 진에 이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장안 중심의 역사를 정립할 필요를 느꼈고 그래서 사서를 편찬하게 되었다. 한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당은 한이 분리된 역사를 기록한 이후 당에 이르는 국가를 포함하여 장안 중심의 지나족(한부족)역사를 재정립했다. 장안 중심의 역사가 정립되면서 요동(요의 동쪽)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을 동이 또는 북이로 기록하다가 동이로 통일하여 부르게 되었다. 기자가 살았던 기땅이 동이의 조선 땅이었는데 기 남쪽 항성(項城)이 사로신라와 당의 경계였다. 당이 장안을 중심으로 존재하면서 아시아에서 중부국가라는 개념이 중국으로 자연스럽게 사용이 되었다. 장안중심의 한나라 때부터 지나족(한족:한부족)으로 불렀는데 당이 망하고 중부국가와 요의 동쪽 동이국 사로신라도 망하고 송이 건국한 이후 송에 의해서 중부국가 개념과 구리 후예의 동이사상을 하나의 사상으로 만든 “중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요이후 북경중심이 되고 중화사상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중화는 한과 당이 동이에서 분리를 선언했던 장안 중심의 지나족(한족)과 요의 동쪽 동이일부를 중화(中化)한다는 “중화사상(中化思想)”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여진다. 중화사상이 정립되면서 동이(東夷)의 숭배를 받고 있는 서여(胥餘), 바로 그 기자가 살았던 기(箕)의 지명을 변경시키게 되었을 것이다. 기에 살던 기자의 이름 서여(胥餘)에서 서(胥)자를 빼고 중화사상(中華思想)에서 화(華)자를 빼내어 서화(胥華)를 만들고 “동음이자화”에 의하여 서화(西華)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것은 『대청일통지』에 "서화고기지(西華故箕地)"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것이다. 황해 서쪽에서 송은 동이일부를 병합하고 그 지명마저도 중화사상에 의해서 변경시킨 사례인 것이다. 기땅을 서화로 변경하여 지나족(한부족)과 동이의 중화를 꾀하고 동이의 영역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지나족들이 기술한 사서가 존재하고 우리의 기록이 존재하는 한 요의 동쪽인 하남성 서화 항성의 동쪽은 구리(九黎)시대부터 9세기까지 동이의 영역이었다. 이 법칙이 적용된 예가 있다. - 新羅錦→襄邑→雎 - 신라금→양읍→저 - 新羅安錦→涉羅→新安 - 신라안금→섭라→신안 이다.(나전칠기 항목) (2). 다른 뜻으로 볼 수 있는 표현 방법의 문제 해석에서 오해를 불러 일으켜 전혀 다른 뜻으로 보일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현재 보급되어 있는 사마천의 『사기』는 건륭4년(1739년)에 교간된 것이다. ①『사기』권38 기자자(箕子者)의 해설에서 당의 사마정(司馬貞)이 색은(索隱)을 첨가했다. - 箕子者杜預云梁國蒙縣有箕子塚 “두예가 말하기를 양국몽현에 기자 묘가 있다”란 기록을 남겼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양국(梁國)이란 말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 - 두예(杜預)는 223-284년 사이에 살았던 인물이며 진(晋)나라의 무장(武將)이었다 - 양국(梁國)은 501-577년 사이에 있던 국가이다. - 당(唐)은 618-907년까지 존재했던 국가이다. 무심히 흘려 버릴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284년에 세상을 떠난 분이 501년에 건국한 양(梁)나라를 언급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 춘추전국시대 양나라가 있었는가 ? 서주(西周)나 동주(東周)의 일부분으로 양(梁)이 있었다 하더라도 양국(梁國)으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물론 한나라 이전의 국(國)은 나라가 아닌 지방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고는 하지만 두예가 있을 때는 國은 그래도 나라로 표현되었을 것이 아닌가. 지방을 國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이곳에는 나라로 표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언된 말이 기록됐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당(唐)때 삽입이 됐을까 아니면 739년에 교간(校刊)될 때 삽입이 됐을까 ? 몽성(蒙城)이 양(梁:502-577)나라 땅이 아님을 나타낸 기록에 "고구려 백제가 강병백만을 보유하고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을 다스렸다"고 하였고 신라와 당의 경계인 항성 북쪽에 기자(箕子)시대 조선땅 서화(西華)가 있으니 서화 항성 동쪽이 동이민족강역임을 숨기기 위한 때문일까 ? - 고구려 정광(正光 : 520-521)기록에 광주(光州)가 있는데 중국 하남성 광주의 북쪽에 신라와 당의 교역 지점인 항성(項城)과 주(周)와 조선(朝鮮)경계 지역인 서화(西華)가 있고 그 동쪽에 기자 능이 있는 몽성(蒙城)이 있다. - 정시(正始)(504-507)에 나전칠기 고장 섭라(涉羅)를 고구려가 백제에게 빼앗겼는데 중국 안휘성 섭(흡) 즉 신안(新安)의 북쪽에 몽성(蒙城)이 있다. - 송서, 양서, 남사에서 산서성 요의 서쪽 진성과 고평이 백제땅이었다고 하는데 그 동남쪽에 몽성이 있다. - 숭산의 북쪽에 하수(河水)에서 동쪽으로 제방을 쌓았는데 숭산의 동쪽에 서화 항성 그 동쪽에 몽성이 있다. - 청하(淸河)가 태시(465-471)때 백제의 땅이었는데 하북성 청하의 남쪽에 몽성이 있다. - 항성이 643년에 신라와 당의 교역 항이었는데 하남성 항성의 북쪽에는 서화가 있고 동쪽에 몽성이 있다. 몽성의 주위에는 구리(九黎)시대부터 백제시대까지 동이의 땅이었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사서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데 두예가 죽은 후에 건국된 양(梁)을 언급할 수 있겠는가 ? 우리는 “箕子者 杜預云梁國蒙城有箕子塚”에서 (기자자 두예운양국몽성유기자총) 양국(梁國)에 대해 다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중화사상에 의하여 변경되었던 중요한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혹시 우리가 箕子者 杜預云梁國蒙城有箕子塚에서 梁國에 대해 다시 해석한다면 양음갈(梁音渴:史記)에서 갈(渴)의 발음이 '갈'과 '걸'이므로 하(夏)의 桀(걸)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 ② 양국(梁國)이라는 기록과 비슷한 방법이 『삼국사기』 에도 사용되었다. 홍덕왕3년 (828년) 기록에서 장보고가 "입당서주(入唐徐州)" 했다고 하였다. 이곳에 "입당서주"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역시 “입당”은 삽입구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서주는 고구려 백제가 다스렸다는 북으로 유연제노와 남으로 오월사이에 있다. 서주의 서쪽에는 백제시대의 지명으로 석문, 청하, 동명, 진성 고평, 숭산, 항성, 독산, 동성, 잠산, 덕안이 있으니 동이강역내에 있다. 서주의 서쪽에 신라 지명으로는 석문과 석성, 항성, 동성과 잠산이 있으니 서주는 신라땅이었지 당의 땅은 아니었다. 또 장보고와 정년이 당에서 신라에 돌아왔는데, 보고는 청해(淸海)에 있었고 정년은 사지연수(泗之漣水)에 살았다고, 사서와 『삼국사기』에 기록하고 있음에도 "입당서주"로 기록한 것은 김부식 또는 그 이후의 학자들이 삽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므로 해서 변한지묘예신라(弁韓之苗裔新羅)를 감추고 신라방, 신라원, 신라소를 만들어 우리가 반도에서 옛 요동(요의동쪽, 태행산맥 동쪽)으로 구리(九黎)때부터 신라까지 요동을 침략한 국가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기가 바로 동이의 강역이었음을 사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3) 기자가 살았던 땅까지 밝혀져야 조선(俗 : 고조선) 무대가 밝혀진다. 지금까지도 기자가 한국땅에 왔는가 아닌가를 왈가왈부하면서 조선(고조선)을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남북한지역에 온 것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 다만 중국 하남성에서 안휘성으로 왔을 뿐이니 기자가 살고 묻힌 곳까지 밝혀야 조선(俗:고조선)무대가 정립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한 이후 근세조선의 모든 우리 사서에 기자조선이 들어 있지 않은 사서는 없을 정도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기자조선이 수록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왜 광복 후에는 삽입과 삭제를 반복했을까 ? 그것은 기자가 남북한 지역에 "왔었다" "아니다."라는 상반된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발행 이전의 기록에서는 어떤가 ? 『삼국사기』에도 기자가 살던 땅에 삼국이 있었음은 밝히고 있으나 구체적 기록이 없다. 장안 중심의 『중국25사』에서는 조선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은 있지만 그가 왕으로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우리기록에 기자의 후예인 기후(箕珝)가 번조선왕으로 단군으로부터 임명받은 기록이 있으며 기후의 후예 기비(箕丕)가 해모수시대 조선왕으로 있었고 그 후예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고 그 땅도 해(海) 및 창해(滄海)가 있는 지역으로 되어 있다. 또한 기자가 살던땅은 요(遼)중심의 동쪽에 있는 기(箕 : 서화 : 하남성)이고 묻힌곳은 몽성(안휘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남북한 지역에 왔다는 기록은 없다. 기자는 주(周)나라가 건국될 때의 인물이다. 그가 조선에 살았다면 그가 살던 기(箕:서화)나 몽성은 조선의 일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인들이 기자 묘를 평안도 평양에 만든다고 하여도 『중국25사』에 의한 기자가 살던 땅과 묻힌 곳이 변경될 수는 없다. 기자가 살던 기(箕) 즉 서화와 묻힌 몽성이 조선의 활동무대로 밝혀져야 비로소 조선의 강역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기자가 살던 서화나 묻힌 몽성의 주위에는 조선 이전 九黎의 치우천자 능이 있고, 고구려 백제패망 때의 지명이 있고, 김유신의 활동 지명과 김유신 선조 관계 지명이 있으니 기자의 활동 지역을 찾아야 비로소 우리역사를 밝혀줄 수 있는 것이다. < 기자관련 지도 > ![]() (선그림은 장보고 관련 지명) - 무령 :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었던 곳 - 정해위 : 청해진 추정(고지도 청해 확인 됨) - 법화원 : 정해위 북쪽에 장보고 관련 절인 법화원이 현존 - 진해 : 염장에게 피살당한 장소 - 사, 연수 : 절친한 친구였던 정연 살았던 곳(이곳의 강이름이 “사수“이다) - 서주 : 장보고 관련 지명 - 무주 : 염장은 무주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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