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의 비밀) 이젠 고조선 “기자”의 유물을 찾아내자 (1)
(왜 찾아야만 하는가 ?)
기원전 2700년대 구리국 치우천자의 유적지를 정사의 기록대로
산동성 동평에서 찾았듯이
이제 기원전 1100년대 고조선의 위대한 사상가인 기자의 유물을 찾아
아직도 단군신화 운운하는 O빠진 OO사학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올바른 고조선 역사를 바로 찾아내자
기자의 무덤을 찾아내면 “구리국 -> 고조선”의 역사가 실제로 복원되는 지름길이다
(중국 정사의 기록)
중국 정사인 “사기”에
기자(箕子)의 묘가 안휘성 몽성(蒙城)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梁國蒙縣有箕子塚 - 史記 권30),
(양국몽현유기자총 - 사기 권30),
(杜預曰梁國蒙縣北有薄伐城城內有城湯塚其西有箕子塚 - 수경주 권23)
(두예왈양국몽현북유박벌성성내유성탕총기서유기자총 - 수경주 권23)
기자가 살았던 땅은 하남성 서화(西華)라고 하였다
(西華故箕地在開封府西九十里初聖師食宋箕故稱箕子今邑中有箕子台 - 『大淸一統志』172)
(서화고기지재개봉부서구십리초성사식송기고칭기자금읍중유기자태 - 『대청일통지』172)
(1) 기자의 무덤 위치 : 안휘성 “몽성”
(2) 기자가 살던 땅은 : 하남성 “서화”
(지도표시) 몽성, 서화
(계 속)
기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설명을 하고 소개하였으므로
원문 등 자세한 것은 첨부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다음 사실입니다
“동이의 실존 역사중”
(1) 기원전 2700년대 구리(한웅)시대 14대 “치우천자”
(2) 기원전 1100년대 고조선 시대 “기자”
이 두분은 유명인 인데
한분(치우천자)은 산동성 동평에 무덤이 있고 발굴이 되었으며
한분(기자)은 안휘성 몽성에 무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직 발굴을 못하였다
“기자”의 묘를 발굴하면 고조선의 역사도 실존으로 밝혀질 수밖에 없다
“이제 기자의 묘를 찾아 단군신화 운운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이하 참고바랍니다
(중국 정사의 기록)
(요약)
중국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결과로 요약할 수 있다
(1) 기자가 살았던 시대
기자는 기원전 11세기 중국 주나라 무왕 시절 주왕의 친척으로 기록하고 있어
11세기의 인물임
(2) 기자가 살았던 지역
- 옛 “기”땅인 하남성 “서화”
- 개봉부 서쪽 90리에 있으며 “서화” 가운데에 “기자대”가 있다
(3) 기자가 죽어 묻힌 지역
- 안휘성 “몽성”에 기자묘가 있다
(4) 기자의 이름
-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다
(5) 기자가 고조선에서 한일
- 예의, 농사, 잠업을 가르치고 8조의 교를 만들었다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리시대 -> 단군조선 중 “기자” 등장
(2) 기자는 번한의 일부 (사서의 내용이 일부 달라 이견 있음)
단군왕검은 단군조선 강역을 3개로 나누어 통치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기자는 이중 번한에 등장한다
(3) 서화, 몽성의 위치
기자는 한반도에 온적이 없다. 그렇다면 북한 평양의 기자묘는 무엇인가 ?
고조선의 위인을 모시기 위한 “가묘”로 이해하고 싶다
(중국 정사 원문모음)
- 편의상 원문은 아래에 별도로 올립니다
(25사 사기 권38)
(1)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2) 기자라는 것을 풀이하면 “기”는 나라이름이고 “자”는 작위이다
(3) 기자는 주왕의 친척이며 이름은 “서여”이고 양국의 “몽현”에 기자묘가 있다
(대청통일지 권 172)
서화는 옛 “기”의 땅이다
개봉부의 서쪽 70리에 있다
처음 기자가 송나라 “기”땅에 살았기 때문에 기자라 한 것이다
지금의 읍 가운데 “기자대”가 있다
(위서 권 28)
은나라의 도가 쇄하므로 기자가 조선에 가서 살았다
(후한서 권 85)
(1)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2) 기자는 예의, 농사, 잠업을 가르치고 8조의 교를 만들었다
(삼국지위서동이전집해 권 30)
(1) 기자는 이미 가서 살았다
(2) 주나라 초. 기자의 대가 시작하여 “40세”를 이어갔다
(참고)
“주 무왕 武王” [BC 1169 ?~BC 1116]
중국 주(周)나라의 제2대 왕이며 사실상의 창건자
이름은 발(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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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신화가 아니다
정사와 우리사서의 기록이 말해준다
이렇게 사서에 정확히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젠 기자의 무덤을 찾자
서화에 있었다는 기자대의 흔적도 찾아보자
바로 동이의 주 강역내에 있다
기자는 고구려 시대에 "기자신"이라 할 정도로 모신 동이의 대사상가 였다
한국측 기록은 내일 다시 살펴 봅니다
감사합니다
(계 속)
(이젠 기자를 찾자) “기자관련 우리의 古기록” (강동민)
(기자에 대한 국내인식)
(1) 북한 : 기자는 실존인물, 평양에 기자무덤을 발굴하여 실존인물로 인정하고 있다
(2) 강단 : 기자는 전설속의 중국인물일뿐 우리와 상관없으므로 교과서에서도 삭제하였다
(3) 민족사학계 : 기자는 치우천자와 마찬가지도 동이의 위인으로 대사상가 였던 실존인물이다
(운영자 생각)
서로의 견해가 극과극을 달리고 있는데
둘중 하나는 분명히 “머리가 아프거나, 돈 사람일 것이다(^.^)”
수많은 기자 관련자료들이 정사는 물론 다수의 자료가 현존하고 있음에도 이를 연구를 하기는 커녕
전설속의 중국 인물로 단정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
이런 O들이 역사교육을 하고 있으니 이나라 장래가 ........(?)
이하 참고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기자 고기록 모음)
아래 자료는 민족문화연구원 강동민 원장님이
2003년 2월 14일 제손에 직접 전해주신 소중한 자료입니다
국사교과서를 “검인정”으로 변경케 한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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