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幸州奇氏-◆

우리의 뿌리 - 덕성군 과 오 남 재

기영석 2014. 12. 5. 17:14

우리의 뿌리 - 덕성군 과 오 남 재

 

 우리 부안 일가들은 수십 년 전부터 현재까지 광주의 덕성군 문중을 큰 문중으로 하여 매년 시제에 동참 봉행하여 오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의 뿌리인 덕성군문중을 살펴보려 합니다.

 

1. 호남 명문 행주기씨 광주문중의 탄생

 

12세 기찬의 넷째아들 13세 진(進)은 동생 준이 기묘사화로 죽자 호남의 용동마을로 은둔하여

오남재를 짓고 정착하여 14세 기대림과 기대승을 두어 덕성군 문중을 이루었고

 

그의 둘째형 원(遠)후손들과 더불어 호남 최고의 명문가로 번성하였다.

 

 덕성군 문중의 세거지를 보면 큰아들 14세 기대림(大臨 승지공)의 후손들은 광주일대에 산다.

둘째아들 기대승(大升 문헌공)의 후손은 형 대림의 증손자 17세 기원(瑗)을 기대승의 손자 기정헌(廷獻)의 아들로 들여서 가문의 대를 이어 광주시 광산등지에 산다.

 이런 연유로 호남에 사는 대부분의 문중 후손들은 실제로는 14세 기대림의 후손들이다.

호남이외에는 14세 기대승의 둘째아들 15세 기효민(孝閔)의 후손인 16세 기령헌(齡獻)의 후손이 경북 고령 나정일대에 16세 기동헌(東獻)의 후손은 파주 장단일대에 살고 그 외에 21세 기학기(學祈)의 후손은 영남의 김해일대에 21세 기학신(學愼)의 후손은 경북 예천 문경 상주일대에 산다.

 

2. 덕성군 문중을 이루신 13세 奇進(기진)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동생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 때 동생이 화를 입자 크게 상심하여 형인 (遠)과 남쪽으로 내려가 숨어 살기로 하여 형 원(遠)은 장성에 고(考)는 소고룡리에 정착한다.

 이 소고룡리가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 용동 마을이고 덕성군 문중의 발상지이다.

용동 마을 입구에 ‘덕성군 유허비’가 있다. 이 자리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라고 하며 뒷산에 그 와 부인의 묘가 있다.

 유허비에서 조금 가면 대문에 '행주기씨 덕성군 문중'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는 오남재(吾南齎)가 나온다. 이 오남재의 글귀를 풀어보면 “내가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오도다.” 라는 뜻으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은거한 가문의 깊은 곡절을 나타내고 있어서 더욱 뜻이 새롭고 절절하다.

 

3. 고봉의 탄생

  기씨 집안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기진(奇進 1487-1555)  동생이 화를 입자 세상일을 멀리하고 호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당대 최고의 석학인 기대승이 광주에서 태어난 것이다.

 퇴계 이황(1501-1570)과 사단칠정논변을 한 고봉 기대승(1527-1572)은 조선 성리학의 꽃을 피운 호남제일의 큰 선비이다. 광주시 광산구 너브실 마을에 있는 월봉서원의 묘정비에는 그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니라.

 

4. 덕성군 유허비 (비문발췌)

 공의 휘는 진이고 자는 자순이고 성은 기씨이고 행주인 이니라

증조의 휘는 건(10세)이고 판중추부사이고 시호가 정무이며 조부의 휘는 축(11세)이고 풍저창부사이고 증직이 좌승지에 이르렀으며 부의 휘는 찬(12세)이고 홍문관부응교이고 증직이 이조참판이다.

 공이 아우인 준과 더불어 학문을 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가정 원년에 급제하였으나 아우가 기묘사화를 당하고 사망함으로 공께서 다시는 당세에 뜻을 두지 아니하여 벼슬을 구하지 아니하고 형인 기원과 남쪽으로 은둔하여 광주에 거주하였는데 고향에서는 고룡이라 말하고 고을에서는 금정이라고 말하였다. 후에 아들 대승의 광국훈으로 덕성군에 봉하였으며 향년은 육십구세이니라.

 장자는 대림인데 참봉을 행하고 증직이 승정원 좌승지이며 2자는 대승인데 사간원 대사간이고 예문관 대제학이며 덕원군에 봉하고 시호는 문헌이며 3자는 대절인데 참봉이고 장예원사평이었다.

 아아! 천성의 자질이 정직하고 신실하며 평이하고 광명하여 사람과 의견이 반대되는데 서지 아니 하였으며 엄숙하되 가혹하지 아니하며 검소하고 교태하지 아니하였으며 글을 보고 큰 뜻을 통 할 것을 힘쓰면서 일찍 문장을 찾고 글구를 적취하지 아니하였으며 저서로 시문 수백편이 있으며 가훈을 지어서 자손을 경계 하니라.

글. 27세손 부안문중 기세진 (문중자료를 근거로 편집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