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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을 위한 일곱 가지 방법 ]

기영석 2009. 2. 17. 23:35

[시창작을 위한 일곱 가지 방법 ]

첫째 장식없는 시를 써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 시적 공간만으로 전해 지는 것,
그것이 시의 매력이다.
시를 쓸때는 기성시인의 풍을 따르지 말고
남이 하지 않는 얘기를 하라.
주위의 모든 것은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시의 자료가 되는 느낌들을 많이 가지고 있게 되면
시를 쓰는 어느 날 그것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시는 관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구체화되고 형상화 되었을 때 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묘사하는 연습을 많이 하라.

둘째 시는 감상이 아니라 경험임을 기억하라

시는 경험의 밑바탕에 있는 단단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구체적 언어를 이끌어 내 준다.
단지 감상만 갖고서는 시가 될 수 없으며
좋은 시는 감상을 넘어서야 나올 수 있다.
시는 개인으로부터 시작했지만 개인을 넘어서야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시만 계속해서 쓰면 '나'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넘어선 '나'의 시를 쓰라.
단, 시를 쓰는 일이란 끊임없이 누군 가를 격려하는 일임도 기억해야 한다.
(예)'따뜻함' / 강은교
웅덩이 건너편 모래가/웅덩이 쪽 모래를 손짓하는 새/ 아침별이
저녁별을 손짓하는 새/햇빛 한 올이 제 동무 햇빛을 부르러 간 새

셋째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고
자신을, 자신이 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라

'내가 정말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지 말고 신념을 갖고 시를 쓰라.
나의 시를 내가 맏지 않으면 누가 믿어 주겠으며
나의 시에 내가 감동하지 않으면 누가 감동해 주겠는가.
시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엔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시가 처음 당신에게 다가왔던 때를 돌아보라.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이렇게 충고한다.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 왜 하필 당신은 시를 쓰려고 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쓰는가?'라고.
우리는 신념을 갖고 시를 쓰되 남이 이해할 수 있는 시를 써야 한다.

네 번째, 시의 힘에 대하여

좋은 시에는 전율을 주는 힘이 있다.
미국의 자연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고 전율하지 않는 사람은 한물간 사람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일몰과 일출을 보는 습관을 가지라.'
그는 자연에서 생의 전율을느끼라고 충고한다.
우리의삶에서 가장 전율을 많이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가 주는 스파크, 음악 등이 아니겠는가.
허나 살다가 보면 이때의 전율도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시는 정신적으로 전율을 느껴야만 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려면 전율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
표현과 기교는 차차로 연습할 수 있지만
감동과 전율은 연습할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에게 감동이 혹은 전율이 스무살때처럼 순수하게 올 수 있을까?
그 순수한 전율을 맛보기 위해서는 시인의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다섯 번째 자유로운 정신(Nomade)에 대해서

원래 '노마드(Nomade)' 란 정착을 싫어하는 유목민에서 나온 말이다.
이말은 무정부 상태, 틀을 깬 상태, 즉 완전한 자유를 의미한다.
예술의 힘, 시의 힘은 바로 이 노마드의 힘이 아닐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어떤 틀에 사로잡혀 있는 국화빵의 틀에 이미 찍혀 있는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틀을 깨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
흔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틀을 깨는 과정에서
술(알콜)의 힘을 빌어야 좋은 문장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술을 도구로 하여 얻어지는상태가 과연 진짜 자유인가를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건 자유를 빙자한 다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술의 힘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려져 있지 않은
순백의 캔버스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만 술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

여섯 번째 '낯설게 하기'와 '침묵의 기법'을 읽히자

우리는 상투 언어에서 벗어나 '낯설게 하기' 기법을 익혀야 한다.
상투의 틀에 붙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신으로 긴장을 살려나가자.
감상적인 시는 분위기로밖에 남지 않으며
'시 자체'와 '시적인 것'은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시적인 것은 시의알맹이가 아니다.
시적인 것에만 너무 붙들려 있으면 시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시가 긴장하여 이데올로기의 자유를 성취하는 순간
깜짝 놀랄 구절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정신을 지니자.
몸의 자유가 뭐 그리 중요한가?

또한 "침묵의 기술, 생략의 기술"도 익히자.
예를 들어 T.S. 엘리어트 의 황무지라는 시는
우리에게 침묵의 공간을 보여주고 있는 시다.
시와 유행가의 차이는 그것이 의미있는 침묵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시는 감상이 아니라 우리를 긴장시키는 힘이 있는 것인데,
만약 설명하려다 보면 감상의 넋두리로 떨어져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보다 침묵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그 시는 성공할 것이다.
말라르메는 말했다.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이 짧은 두 행의 사이에는
시인 자신이 말로 설명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이 보이는가?
그러나 침묵의 기술을 익히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한 법.
우리는 많이 쓰고 또 그만큼 많이 지워야 한다.
시를 쓸때도 다른 모든 세상일처럼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며
더욱이 말로 다 설명하지 않으면서 형상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일곱 번째 '소유'에 대한 시인의 마음가짐

시를 쓰고, 어느 정도의 성취를 맛보려면 약간의 결핍현상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매사 풍요한 상태에선 시가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긴 하겠지만
시인이 되려는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해선 안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