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기씨 열녀문이 세워지게 된 이야기.
기씨부인은 대학자 기대승(奇大升)의 딸로 당시 덕망으로 이름 높은 문장가이자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손부이다. 기씨부인은 김인후의 손자인 남중에게 시집을 왔는데 단정한 용모와 조용한 성품, 시부모 공경, 일가 친척 사이의 우애, 야무진 집안 일처리 등으로 마을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했다.
임진왜란에 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김남중의 집안은 피난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남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피난을 떠나고 기씨 부인은 남아서 집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는데, 남편이 차마 기씨 부인을 두고 떠나지 못하자 부인은 “처는 없으면 다시 얻을 수 있지만 부모는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어서 길을 떠나십시오.”라며 남편을 독려하였다.
전쟁의 사태가 악화되자 기씨 부인도 친정인 임곡으로 잠시 피난을 떠났다가 왜군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마을로 되돌아오던 중이었다. 황룡강을 막 건넜을 때 갑자기 왜군들이 나타나서 기씨 부인 앞으로 달려들어 팔을 잡아 이끌었다. 부인은 깜짝 놀랐지만, 태연히 “썩 물러 섯거라!”라며 호통을 쳤다. 왜군이 팔을 놓아주지 않자 미리 간직했던 칼을 빼서 왜군들에게 붙잡힌 팔을 잘라버렸다. 부인의 팔이 땅에 떨어지고 선명한 피가 붉게 흘렀으나 부인은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지 눈살 하나 찌푸림이 없었다.
왜군들은 기씨 부인의 태도에 놀라서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들 모습이 사라지자 기씨 부인은 땅 위에 떨어진 팔뚝은 뒤로 한 채 강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었다. 바람과 함께 유유히 흐르는 황룡강 위로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부인은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본 노비는 땅 위에 떨어진 팔을 거두어 소중히 간직했다.
노비는 이듬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 김남중에게 그 사연을 전했다. 김남중은 안타까운 마음에 크게 통곡하고 말았다.
이 사연을 들은 조정은 맥동마을에 정문을 세워 기씨 부인의 뜻을 기리고 훗날 사람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출처:http://hjkee.com/one_html/index.php?menu_id=88 바로가기
'가족사랑 > ◆-幸州奇氏-◆'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급제순으로 기록) (0) | 2011.11.21 |
---|---|
기자실기 (0) | 2011.11.21 |
기황후(奇皇后)/지식에서퍼옴 (0) | 2011.11.21 |
행주기씨/백과사전 (0) | 2011.11.21 |
마한 (0) | 2011.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