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사랑/◆-幸州奇氏-◆

기자실기

기영석 2011. 11. 21. 01:27

기자실기

율곡 이이지음

기자(箕子)의 성(姓)은 자(子)씨 이고 이름(名)은 서여(胥餘) 또는 수유(須臾)라 하며 상(商)나라 왕의 친척인 종실(宗室)이다. 학문(學文)은 우(禹)가 신귀(神龜)의 부문(負文)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인 아홉가지로 되어있는 구주(九疇)를 밝혔고, 몸은 성인(聖人)의 도(道)를 전하였다. 왕(王) 직접 통치하는 왕성(王城)을 중심으로 반경(半徑) 500리 안에 봉해진 기내(畿內)의 제후(諸侯)로서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로 구분되는 삼공(三公)의 하나로 벼슬하여 태사(太師)가 되었다.

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에는 은(殷) 나라의 29대왕으로 나오고 역대제왕연표(歷代帝王年表) 에는 27대왕으로 기록된 주왕(紂王)과 미자(微子)의 아버지이고 기자와는 형제의 열에 있는 제을(帝乙)의 적자(嫡子) 수(受)가 타고난 말솜씨가 좋아고 경박(輕薄)하여 충간(忠諫) 하는 말을 거부(拒否)하고 그릇된 비리(非理)를 좋아하고 옳다고 꾸며대었으되 그의 서형(庶兄) 계(啓)는 조심성(操心性)이 있고 효도(孝道)가 극진(極盡)하였다. 기자(箕子) 생각에 주(紂)는 좋은 왕(王)감이 되지 못함을 짐작(斟酌)하고 계(啓)는 나이를 더 먹었으면서도 또한 현량(賢良)하므로 태자(太子)로 봉(封)하도록 제을(帝乙)에게 권(勸)하였다. 그러나 제을(帝乙)이 적자(嫡子)를 버릴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수(受)를 태자(太子)에 봉(封)하고 계(啓)를 미자(微子)로 봉(封)하였다. 제을(帝乙)이 죽은 후 수(受)가 즉위(卽位)하니 왕호(王號)를 주(紂)라 칭(稱)하였다. 주왕이 왕위(王位)에 오르는 즉시 상아(象牙) 젓가락을 마련하는지라 기자(箕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임금이 상아젓가락을 만들었으니 또 반드시 옥(玉)으로 술잔도 만들 것이고, 옥잔을 만들면 반드시 먼 지방의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을 구하여 사용하기 위해 진상(進上)토록 할 것이다. 수레와 말, 궁실 치장에 이르기까지 궁실(宮室)과 여러 기구(器具)의 사치가 지금부터 차차로 심(甚)할 것이로다 하였다. 주왕(紂王)의 음탕(淫蕩)하고 폭악(暴惡)함이 나날이 심해지자 미자(微子)는 탕왕(湯王)이 나라를 세우고 그의 선조인 설(卨)이 상(商)에 봉하여졌었으므로 그대로 국호를 상이라고 하다가 반경(盤庚)에 이르러 도읍을 은(殷)으로 옮기고 또한 국호를 은(殷)이라 하였으므로 후세에서는 상(商)과 은(殷) 두 가지 이름을 같이 쓰고 있고 건국하여 644년을 유지하였으며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하나인 은(殷)나라가 망(亡)할까 염려하여 기자(箕子)와 삼공(三公)의 다음가는 위치인 소사(少師)벼슬을 하고 있던 기자와 같이 주왕의 숙부중에 한명인 우비(于比)와 함께 상의하였다. 이제 은(殷)나라가 망하는 것은 마치 큰 물을 건너는데 배 댈 언덕도 나루도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형세인데도 지금 우리가 어떠한 지침(指針)도 없고 어느 날엔가는 망할 것이 짐작되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였다. 기자(箕子)는 말하기를 상(商)나라에 이제 큰 재난(災難)이 있으니 나는 주왕(紂王)과 같이 패망(敗亡)할 것이다, 상(商)이 멸망(滅亡)하더라도 나는 단연코 타인의 신복(臣僕)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왕자께 떠나감이 도리임을 알리니, 내가 전에 제을에게 주를 세우지 말고 왕자를 세우라고 말한 것이 왕자를 해치게 되었다. 왕자가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 것이니 각자 마땅히 행해야 할 의리를 행함으로써 그 충의를 선왕께 바쳐야 할 것이다. 나는 은둔(隱遯)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미자(微子)는 이리하여 떠나가 버리고 기자(箕子)는 주왕(紂王)에게 옳은 정치를 충간(忠諫)하였으나 주왕(紂王)이 듣지 않고 기자(箕子)를 가두고 종으로 삼았다. 어떤 사람은 버리고 가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기자(箕子)는 신하(臣下)된 도리(道理)에 충간(忠諫)하다가 왕이 듣지 아니한다고 왕을 버리고 가면 이것은 왕의 악행(惡行)을 드러내고 자기만이 백성의 환심을 얻으려는 것이니 나는 못할 일이다 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척하여 갖은 모욕(侮辱)을 다 받으면서 거문고와 노래로 비애(悲哀)를 스스로 위로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악부 금곡가사(樂府琴曲歌辭)의 하나인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해 온다. 비간(比干)은 계속하여 충간(忠諫)하다가 주왕(紂王)에게 피살(被殺)되었다. 은(殷)나라의 서백(西伯)인 문왕(文王)의 아들로 이름은 발(發)이며 아버지 문왕이 죽자 장사도 지내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을 멸망시켰으며 나라를 세워 주(周)라 하여 그 제1대 임금이 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토멸(討滅)하고 문왕(文王)의 서자(庶子)로 주공과 함께 무왕을 도와 삼공(三公)에 오르며 북연(北燕)에 봉하여 졌으므로 소백(召伯)이라고 일컬어 지는 소공(召公) 석(奭)에게 명령하여 옥에 갇힌 기자를 풀어주게 한 후에 무왕이 나아가 기자(箕子)를 찾아보고 마음을 비우고 내가 주왕(紂王)를 죽인 것이 옳은 일인가 잘못한 일인가 라고 은(殷)나라의 망(亡)한 까닭을 물었다. 기자(箕子)는 차마 답변하지 못하였다.

무왕은 다시 천도(天道)에 대(對)하여 물었다.

기자(箕子)여! 하늘이 은연중에 화(禍)와 복(福)을 내려 백성들을 안정되게 하여 그들의 삶을 보살펴 주고 평화롭게 하셨는데 나는 그 윤리(倫理)의 차례를 어떻게 제정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기자는 그제서야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듣건데 옛적에 우왕(禹王)의 아버지로 요(堯)임금의 명을 받아 치수(治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천명에 순종하지 않고 중인과 불화하고 사람을 상하고 물건을 해쳤다 하며 사흉(四凶)의 하나로서 순(舜)임금에 의하여 우산에 갇혀 죽음에 이르렀다는 곤왕은 홍수(洪水)를 다스리는데 있어 우주간에 쉴새 없이 운행되는 다섯가지 원소. 즉,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를 말하는 오행(五行)의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하늘이 이에 크게 화내서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내려 주시지 않으시매, 윤리(倫理)가 퇴폐(頹廢)하고 무너졌습니다. 곤은 문책 되어 죽고, 아들 우왕(禹王)이 대(代)를 이으니 이에 치수(治水)를 계속하자, 하늘이 우왕(禹王)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니, 이는 윤리(倫理)의 정해진 바 질서(秩序)가 차례대로 펴졌습니다. 이리하여 홍범(洪範)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그 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행(五行)이요(一曰五行),

둘째는 공경하되 몸을 닦는 다섯 가지의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로 오사(五事)로써 하는 것(二曰敬用五事),

세째는 농사(農)에 백성을 다스리는 여덟 가지의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로 팔정(八政)으로써 하는 것(三曰農用八政),

네째는 부합(協)함을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의 오기(五紀)로써 하는 것(四曰協用五紀),

다섯째는 건립(建立)함에 있어 황은 임금이오 극은 표준과 같으니, 임금이 표준 정함에 사방이 이 표준에 대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받아들여 정하는 의미를 오황극(五皇極)에서 말한 것으로 즉,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로 다른 팔주(八疇)의 근본이 되는 것인 황극(皇極)으로써 하는 것(五曰建用皇極),

여섯째는 다스림(乂)을 정직(正直), 강극(剛克), 유극(柔克)의 삼덕(三德)으로써 하는 것(六曰乂用三德),

일곱째는 명철(明)함에 있어 계는 상고한다는 뜻이니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점을 쳐서 결정함을 말하는 계의(稽疑)로써 하는 것(七曰明用稽疑),

여덟째는 고려(念)함에서 서(庶)는 하나뿐이 아니고 많다는 말이다. 징(徵)은 징험(徵驗)이니 우(雨). 양(暘), 욱( ), 한(寒), 풍(風)등이다. 이것이 각각 때로써 오는 것이므로 시(時)가 포함되는데 때에 맞는 휴징(休徵)이 있고 때를 잃은 구징(咎徵)이 있으므로 때에 맞는 서징(庶徵)으로써 하는 것(八曰念用庶徵),

아홉째는 누림(嚮)을 수명(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오복(五福)으로써(九曰嚮用五福) 하고 위협(威)함을 흉단절(凶短折), 질병(疾), 우환(憂), 빈한(貧), 악(惡), 약(弱)의 육극(六極)으로써 하는 것이 위용육극(威用六極)이라. 그 중에서 황극(皇極)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이 왕이 의리(義理)를 쫓아야 하고 사사로이 좋아하는 바 없이 좋은 일을 하여 왕의 도리(道理)를 쫓아야 하며, 사사로이 싫어하는 바 없이 악(惡)한 일을 없이 하여 왕의 갈 길을 쫓아야 한다, 사사로움 없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할 것이요, 어김이 없고 그르침이 없어야 왕도가 정직해질 것이다. 천자가 신하를 모으는 데도 법칙이 있어야 하고, 신하들이 천자에게 따름에도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을 위하여 도(道)를 전(傳)해 주었으나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무왕(武王) 역시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았다. 기자(箕子)는 주(周)나라를 피(避)하여 동쪽으로 조선(朝鮮)에 들어 오니 주(周)나라 사람 중에 따르는 자가 오천(五千)이다. 시(詩), 서(書), 예(藝), 악(樂)과 의(醫), 무(巫), 음양(陰陽), 복서(卜筮) 같은 것과 기술(技術) 예술(藝術) 등 백공(百工)이 모두 따라왔다. 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는 그를 조선에 봉하여 평양에 도읍케 하였다. 처음에는 언어(言語)가 통하지 않아서 통역(通譯)으로 의사(意思)를 서로 통하였다. 백성에게 예의(禮義)와 농사(農事) 양잠(養蠶) 직조(織造)를 가르치고 경계를 구획 구분하는 고대의 농경 조세 등을 위하여 만든 전지(田地)의 제도로 하(夏)나라 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은(殷)나라와 주(周)나라가 다소 내용을 달리하기도 하나 대체로 10분의 1을 조세로 받았던 제도로 대체로 사방 1리(里)의 땅을 1정(井)이라 하고 면적은 9백 묘(畝)이니 이를 정자(井字)형으로 9등분하여 8가에 100묘식 분전하고 중앙의100묘를 공전(公田)이라 하여 8가가 공동으로 농사지어 조세를 내는 정전(井田)의 제도 등을 가르쳤다.

금기하는 법령 8조목을 만들었으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살인자(殺人者)는 생명(生命)으로 보상(報償)하고 남을 다치게하는 상해죄(傷害罪)는 곡식(穀食)으로 보상(報償)하고 남의 것을 도적질한 자로 잡아서 종으로 천역(賤役)을 치르게 하였다. 스스로 속죄(贖罪)하고자 하는 자는 오십만(五十萬)을 내야하고, 혹은 용서(容恕)받은 사람이라도 이웃이 수치(羞恥)로 여겨 시집 가고 장가 들려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도적이 없으니 문단속의 필요가 없게 되고 부인들은 모두 정숙(貞淑)해졌다. 시골이건 도시이건 음식을 먹을 때 음식에는 콩을 쓸 줄 알고 유교(儒敎)를 신앙(信仰)하여 따르게 되었다. 전쟁(戰爭)을 숭상하지 않고 덕을 가지고 광폭(狂暴)한 자를 복종하게 하자 이웃나라가 모두 그 의로움에 감화(感化)되어 귀속(歸屬)하였으며 의관의 제도는 모두 은나라와 똑같이 하였다. 그 뒤에 기자가 주(周)나라 임금을 만나러 갔을 때 은나라 옛터를 지났는데, 궁실이 무너져서 벼와 기장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서러워하며 슬퍼서 소리내어 울자니 그럴수도 없고, 흐느끼자니 아낙네 같아서 보리가 자라 나는 맥수(麥秀)의 노래를 지었다.

보리이삭 잘도 자라고 麥秀漸兮

벼와 기장만 윤이 나네 禾 油兮

저 교활한 아이(은나라 주왕) 彼狡童兮

나와 의 좋지 않았다 不與我好兮

(殷)나라 백성들이 이 노래를 듣고 모두 울었다 한다. 

조선(朝鮮)이 인자한 현인의 덕화(德化)를 받아서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나라가 되어 조정이나 민간이나 아무 일이 없어져서 백성이 기쁨에 넘쳐서 대동강(大洞江)을 황하(黃河)에 비유하여 노래를 지어 그 덕을 기리었다. 그 후 기자(箕子)께서 돌아가니 기씨(箕氏)가 대대로 동녘 땅의 임금이 되었다. 주(周)나라 말엽(末葉)에 주(周)나라 연(燕)땅의 제후가 스스로 왕이라 일컫고 장차 동쪽으로 조선(朝鮮)을 침공(侵攻)하려 하자 조선후(朝鮮侯)도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정벌하여 주나라를 도우려 하였다. 그러나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조언하여 중지하였으며, 예(禮)를 서쪽 연나라로 보내어 연나라를 달래니 연나라도 역시 중지하고서 침범하지 않았다. 조선후도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조선(朝鮮)의 자손(子孫)들이 점차로 자신만만하고 중원에 대하여 당당하여졌을 때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가 침략하여 서방2천여리의 땅을 빼앗기고 만반한(萬潘汗)에 이르러 경계를 삼으니 조선이 드디어 쇠약하여졌다. 진(進)나라 시황제가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고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구축(構築)하니 조선(朝鮮)의 왕 기비(箕否)는 진(秦)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속(服屬)하고 말았다. 부왕(否王)이 죽고 아들 준(準)이 왕위(王位)에 오른지 십년(十年)에 진(秦)나라가 망하고 유방의 한나라와 항우의 초나라가 싸우면서 연(燕), 제(濟), 조(趙)나라를 토멸(討滅)하니 망명(亡命)하여 입국(入國)하는 자(者)가 많았다. 한나라 통일후에 조선(朝鮮)은 연(燕)나라와 패수(浿水)로써 국경(國境)을 삼았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의 친구로 장군이 되어 통일전쟁에서 공이 있으므로 연(燕)나라 왕(王)이 된 노관(盧琯)이 한나라 유방에 반(叛)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므로 그 신하(臣下)였던 위만(衛滿)이 천여(千餘) 무리을 거느리고 패수(浿水)를 건너와서 서부(西部)에 접주(接住)하면서 한나라의 침입(侵入)을 방비(防備)하는 울타리가 되겠다고 요청하므로 준왕(準)이 이것을 믿고 박사(博士)의 직위(職位)와 옥(玉)으로 만든 제후를 봉할 때 신부(信符)로 주는 것으로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난 모양으로 작위에 따라 각각 길고 짧은 등의 차이가 있는 홀(忽) 혹은 규(圭)를 하사(下賜)하고 백리(百里) 땅을 봉(封)하여 주면서 서부변방(西部邊方)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위만(衛滿)이 망명군졸(亡命軍卒)을 유치(誘致)하여 형세(形勢)가 왕성(旺盛)해지니 준왕(準王)에게 한(漢)나라 군사가 10개 도로(道路)로 침략하여오고 있으므로 자기(自己)가 들어와서 근위대(近衛隊)로서 왕궁(王宮)을 방위하고자 한다고 속여 놓고 준왕(準王)을 공격(攻擊)하였다. 준왕(準王)이 싸웠지만 대적하지 못하고 배를 타고 해로(海路)를 이용(利用)하여 남(南)쪽으로 달아나니 조선(朝鮮)은 위만(衛滿)의 차지가 되었다. 기자이후(箕子以後) 41대 928년만에 나라를 잃었다. 기준(箕準)은 쫓겨날 때 측근의 신하들과 궁인(宮人)을 거느리고 한(韓)나라 땅 금마군(金馬郡)에 와서 마한왕(馬韓王)이 되고 50여 대소국(大小國)을 통합(統合)하여 여러 대(代)를 계승(繼承)하여 왕위(王位)를 전(傳)하였다.

그 후 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삼국(三國)이 점점 커지면서 마한(馬韓)이 쇠퇴(衰退)하니 백제(百濟)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26년에 마한(馬韓)을 습격(襲擊)하여 합병(合倂)하였다. 기씨(箕氏)가 마한(馬韓)의 왕통(王統)을 가진 것이 200년으로 왕위를 전한 것이 전후(前後) 1220여년(餘年)이었다.

(贊)하여 왈(曰)

아아, 은태사(殷太師)여, ?歟太師

암군시대(暗君時代) 태어나서 運遭明夷

내외괘(內外卦)의 운기(運氣)따라 內貞而晦

행사(行事)마다 의(義)로 웠네 製義隨時

머리풀어 종이되고 거문고를 타는 뜻을 被髮操音

하나님은 알리로다 惟天我知

내 나라가 망(亡)했거늘 宗國旣淪

내 갈 곳은 어디인가 嗚呼曷歸

창희(蒼姬;문왕)에게 법(法)을 주고 法授蒼姬

푸른 구슬에 몸을 담아 身?靑

크게 국토를 개척하여 誕闢土宇

낙랑(樂浪)에 도읍하였네. 樂浪作京

긴 밤 어둠같은 첩역(조선) 땅을 첩域長夜

비로소 해나 별처럼 밝히었네 肇昭日星

팔조(八條)의 금법 만들고 禁設八條

예악(禮樂)으로 문화 선포하였네. 文宣禮樂

대동강은 맑고 맑고 江淸大同

태백산(太白山)은 높았네 山重太白

자손은 연이어 번창하니 子孫繩繩

천년의 봉사(奉祀) 정해졌네 千祀是卜

오세(五世)에 끊어지지 않았으니 五世不斬

아직도 끼친 은혜 받고 있다오 ?受遺澤

어진 임금에게 제사로 보답하기 報祀仁闢

하늘이 다하도록 어젯일같이 하네 極天如昨

살펴 보건대 하늘이 인성(人牲)을 창조(創調) 할 때에 반드시 성인(聖人)을 보내서 이를 주도(主導)하게 하여 바른 길로 돕고 길러서 사회문화(社會文化)를 밝혀 그 생활(生活)을 순행케 하고 그 교본을 세우는 것이니 복의(伏義)로부터 이하 우, 탕, 문무의 삼왕(三王)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인(聖人)으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사회문물(社會文物)의 길을 열어 놓았으므로 임금으로 삼으신 것이다.

태고적(太古的) 우리나라에도 백성이 있어 살아온지 은(殷)나라보다 뒤늦지 않은 것 같은데 천지 만물에 깊이 통하는 성인의 지혜를 가진 슬기로운 철인(哲人)이 나와서 임금이면서 또한 사회의 스승인 군사(君師)의 구실을 다한 바 있다고 들은 일도 없다. 물론 단군(檀君)께서 처음 납신 성조(聖祖)라고 하였으나 정확한 옛 것을 증거할 만한 기록이나 살아 있는 현인(賢人)인 문헌 (文獻)이 없으므로 참고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기자(箕子)께서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오시어 이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따뜻하게 양육(養育)하고 힘써 가르쳐 주시어 머리를 틀어 얹는 오랑캐의 풍속을 변화시켜 문화가 융성한 나라인 강태공(姜太公)이 건국한 제(齊)나라와 주공(周公)이 건국한 노(魯)나라처럼 제로(齊魯)의 나라로 만들어 주셨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그 은혜를 받아서 예악(禮樂)의 풍습(風習)이 끊임이 없는지라 공자(孔子)께서 바다를 건너서 조선(朝鮮)땅에 살고 싶다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니 좌씨(左氏) 소공원년(昭公元年)에 우왕(禹王)이 아니면 나는 고기가 되었으리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우왕의 공덕을 찬양한 말이니 우왕(禹王)가 아니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탄식이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다.

, 위대하시다. 기자(箕子)이시여, 이미 무왕(武王)에게 홍범(洪範)을 베풀어 주시어  그 도(道)가 주(周)나라 에 밝았고 그 여세(餘勢)를 몰아 조선(朝鮮)을 교화(敎化)하었다. 그 유택(遺澤)이 자손들이 왕위를 전하여 1천여년을 내려오니 임금들이 경모(景慕)하고 숭앙(崇仰)하기를 중천의 해와 달이 보인 듯이 하며 공훈(功勳)에 보답(報答)하려는 그 법식(法式)이 갈수록 더욱 굳건하게 거행하니 진실로 큰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은 성대함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 거룩하시다. 제(濟)나라 사람이 자기 나라 명재상(名宰相)인 관중(管中)이나 안영(晏瓔)만을 알 뿐이니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는 격(格)이다.

공자(孔子)의 제자(弟子)들은 공자(孔子)의 말씀이나 되풀이하고 정주학도(程朱學徒)들은 정주(程子)나 주자(朱子)의 전하여진 가르침만을 치우쳐 전하는 것도 사리(事理)에 당연(當然)한 바이다.

우리나라가 기자(箕子)의 망극(罔極)한 은혜(恩惠)를 받았으니 그 실적(實跡)에 대하여 마땅히 집집마다 읽고 사람마다 익히 알아야 당연하지만 요즘 선비들이 갑작스럽게 기자(箕子)의 사적(事跡)에 대하여 질문을 받으면 물으면 분명한 대답(對答)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것은 기록된 문헌(文獻)이 어수선하게 흩어져서 일일이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 윤두수(尹斗壽)공이 지난날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중국 선비들 중 기자(箕子)의 사적을 묻는 자가 다수였는데 분명하게 답변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귀국한 후에 광범위(廣範圍)하게 경전(經典)과 사서(史書)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워 모아 서적(書籍)에서 사실(事實)을 수집하고 성현의 논하신 것과 그 이하 시인(詩人)들의 가사(歌辭)나 전설(傳說) 등을 모아서 편집(編輯)하니 이것이 기자지(箕子志)이다. 그 공로(功勞)가 참으로 컸고 후학에게 또한 지극히 좋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산만(散漫)하게 각 경전(經典)과 전기(傳記)에서 뒤섞어 편찬하였으므로 계통(系統)을 따져 보기에는 불편(不便)한 점이 많아서 내가 분수에 넘친 일 임에도 불구하고 알고있는 기록되어 있는 것을 골라서 요약하여 한 책을 만들고 기자(箕子)의 건국(建國)하신 시종(始終)과 세계(世系) 역년(歷年)등을 약술(略述)하여 기자실기(箕子實記)라 이름하였으니 후인(後人)들의 관람(觀覽)에 편익(便益)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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