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지식/☎농업··경제☎

<농업진단> 애물단지로 전락한 '富의 척도' 쌀

기영석 2010. 10. 13. 23:36

<농업진단> 애물단지로 전락한 '富의 척도' 쌀

연합뉴스 | 입력 2010.10.13 06:37 | 수정 2010.10.13 08:21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서울

재고 급증 쌀값 끝모를 하향곡선..농가 반발

소비 격감에 풍년, 수입물량 반입, 北 지원 중단

(서산=연합뉴스) 유의주 기자 = 보릿고개를 한참 지나 밥 먹고 살만한 시절에도 쌀을 씻어 일다가 한 톨이라도 물에 흘려보내면 어른들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었다.

'먹는 음식을 버리면 벌받는다'고.

옛 사람 말대로 '밥이 하늘'이면 쌀은 하늘에서 떨어진 금비 정도될까?

지금도 상당수 한국민들의 정서에는 여전히 쌀은 가장 소중한 음식의 상징처럼 자리잡고 있다.

쌀은 한민족의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이밥'을 배불리 먹은 역사는 그리 길지 않아 여전히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21세기 초입들어 한국 쌀은 갑자기 애물단지 신세가 됐다.

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서 수십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 이모(50)씨.

논 1만6천500㎡에서 쌀농사를 짓고 밭 4만9천500㎡에서 배추, 무, 파 등 각종 야채를 재배하는 틈틈이 소 7마리를 키우고 있다.

70이 넘은 노모와 부인과 함께 1년내내 농사에 매달려 얻는 소득이 1억원 안팎인 그는 부농에 속한다.

이씨의 소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밭농사에서 얻는 수입이 7천여만원인 반면, 쌀농사 수입은 2천600만원 가량에 불과하다.

또 키운 소를 시장에 내다팔거나 시간이 남을 때 남의 농사를 도와주고 받는 돈이 1천만원 안팎이다.

여기서 트랙터와 이앙기, 경운기 등 각종 농기계 구입ㆍ유지비용과 농약ㆍ종자값 등 비용 2천여만원을 제외한 이씨의 순수입은 8천만원 안팎이다.

이씨는 "야채 시세가 좋은 올해처럼 밭작물은 가끔 효자 노릇을 하지만 쌀값은 해마다 떨어지기만 한다"면서 "쌀농사만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만석꾼', '천석꾼' 등 한 때 부의 척도로 사용될 정도로 각광받았던 대표작물인 쌀의 의미가 점점 퇴색해가고 있다.

◇쌀값..끝모르는 하향곡선

통계청이 10일 단위로 조사해 발표하는 산지 쌀 가격은 지난달 15일 현재 80㎏ 기준 12만8천524원으로 쌀값 조사 업무가 농협에서 통계청으로 이관된 2007년 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쌀값은 2008년 10월 16만2천424원, 2009년 3월 16만1천963원, 2009년 5월 15만9천744원, 지난해 11월 14만2천861원, 지난 3월 13만9천91원, 5월 13만3천208원으로 끝모를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최근에는 1995년의 쌀 생산자가격 11만4천430원에 근접한 수준으로, 농민단체들이 시위를 벌이며 "쌀값이 15년전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전국농민회총연맹 이창한 정책위원장은 "해가 갈수록 값이 떨어지는 품목이 쌀 외에 도대체 뭐가 있느냐"면서 "1995년 이후 물가상승률이 연평균 9%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농민 입장에서는 너무도 불공정한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대해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최근 수확기에 접어들 때까지 쌀 가격을 14만6천원선까지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국회에서 "(정부 대책으로) 쌀값이 안정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소비 줄고 생산은 늘고..넘쳐나는 쌀

쌀값이 이렇게 하락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쌀 소비량이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생산량은 늘어나는 가운데 관세화 유예에 따른 의무수입물량도 계속 늘어 쌀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70년 136.4㎏에서 1980년 132.4㎏, 1990년 119.6㎏, 2000년 93.6㎏, 2005년 80.7㎏, 지난해 74.0㎏으로 지속적으로 감소했으며 올해는 73.0㎏까지 줄어들 전망이다.

1인당 쌀 소비량은 2008년 기준 일본의 59.0㎏, 대만의 48.1㎏에 비해서는 많은 것이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2015년 66.7㎏, 2020년 59.7㎏으로 일본 수준까지 가파르게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반면 쌀 생산량은 1970년 393만9천t에서 1980년 355만t으로 감소했다가 1990년 560만6천t으로 급격히 늘었다.

2000년 529만1천t, 2005년 476만8천t, 2007년 440만8천t으로 줄었다가 2008년 484만3천t, 2009년 491만6천t으로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서 쌀 관세화를 유예한 우리나라가 2004년 관세화 유예를 2014년까지 연장하면서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최소시장접근(MMA) 물량이 매년 2만t씩 늘어난 것도 큰 부담이다.

MMA물량은 2004년 20만5천t에서 2007년 26만6천t, 올해 32만7천t으로 늘어났으며 내년에는 34만7천t, 2012년 36만8천t, 2014년 40만8천t으로 계속 늘어난다.

이에 따라 쌀 재고는 2001년말 133만5천t으로 정점을 기록한 뒤 2005년 83만2천t, 2007년 69만5천t, 2008년 67만5천t으로 감소했다가 지난해 유례없는 풍작으로 84만6천t으로 늘어났다.

올 연말에는 149만t까지 불어나 정부가 적정 비축량으로 잡고 있는 72만t의 2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쌀 비중ㆍ농가소득 동시 추락

쌀값 하락과 함께 전체 농업생산액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농업생산액중 쌀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39.9%에 달했지만 1995년 26.1%, 2000년 33.0%, 2005년 24.3%에서 지난해에는 20.2%로 급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최근 펴낸 '2010 하반기 농업경제전망'에 따르면 쌀을 포함한 농업부문 총소득은 올해 11조9천600억원에서 2015년 10조5천560억원, 2020년 9조7천750억원으로 완만한 하락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농업부문 총소득중 축산업을 제외한 재배업의 하락세가 커 올해 9조170억원에서 2015년 7조4천850억원, 2020년 6조6천260억원을 기록할 전망이다.

농가소득도 향후 늘어나긴 하지만 도시근로자 가구소득 증가폭보다 상대적으로 증가폭이 작아 도시가구소득과의 편차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도시근로자 가구소득 대비 농가소득 비율은 1990년 97.9%에서 2000년 80.9%, 2005년 78.5%, 올해 64.9%로 낮아진 뒤 2015년과 2020년에는 각각 52.8%와 45.8%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쌀값 폭락 원인ㆍ해법 '제각각'

넘쳐나는 재고가 쌀값 하락의 주범이라는 점은 정부와 농민단체, 농업연구기관 모두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재고가 늘어난 데 대한 원인 진단과 해법 제시는 각양각색이다.

정부는 생활수준 개선에 따른 쌀 소비량 감소와 농업기술의 발전, 기계화된 영농에 따른 생산량 증가 등 원천적인 수급 불균형을 쌀값 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꼽는다.

여기에 2004년 쌀협상 당시 관세화 유예시기를 2014년까지 연장하면서 매년 MMA물량을 2만t씩 늘리기로 함에 따라 수입쌀이 재고 증가에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관세화 유예를 철회하고 2012년부터라도 조기 관세화를 실시, 수입쌀 물량부담을 줄이고 남아도는 쌀을 수출하거나 아프리카 등 기아에 허덕이는 국가에 대규모 원조를 해 길을 터야 한다는 입장이다.

여기다 쌀의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논에 다른 작목을 심을 경우 한시적으로 지원금을 지급하는 등 내년에만 벼 재배면적을 4만㏊ 이상 감축하기로 했다.

내년 예상 수요량인 426만t 이상의 쌀은 전량 매입해 시장에서 격리하고 가공용 쌀 소비기반을 대폭 확충한다는 계획도 마련하고 있다.

농림부 민연태 식량정책과장은 "내년 수요 초과 물량을 격리시키면 쌀 수급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쌀 생산량을 줄이고 가공용 수요 확대 등 재고소진을 위한 대책을 추진한다는 '투 트랙'전략이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농민단체들은 쌀값 하락의 원인 분석에서부터 정부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2004년 당시 정부가 쌀 협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 의무수입 물량이 늘어난데다 현 정부 들어 대북 쌀지원을 전면 중단한 것이 궁극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올해와 내년에 우려되는 '쌀 대란'을 해결하기 위해 중단된 대북 쌀 지원을 정부가 조속히 재개하고 중장기적으로는 쌀 정책과 관련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농 이창한 정책위원장은 "쌀 생산기반의 유지ㆍ보존과 함께 농민소득 지원에 농정의 중점을 두고 쌀 소비 확대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면서 "추곡수매제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식량문제에 책임을 지면서 농민소득 지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yej@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