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자작시

쌍절암의 두 여인 20190403

기영석 2019. 5. 21. 23:58

#합평요청

 

퇴고1

 

쌍절암의 두 여인 / 기영석

 

애틋한 사연 담아

암벽에 새겨진 세 글자

순절한 시누이와 올케

한 품어 낙화되었건만

 

저 멀리 윤슬 위엔

왜가리가 미동치 않다가

절개를 지키려 나래를 편다

 

음지 샛바람 차가운데

오리들 자맥질 이어지고

애잔한 마음 멍하니 홀 긴 듯

강 건너 외산을 바라본다

 

슬픔의 눈물은 강물 되어 흐르고

저버린 나라 원망일랑 하지 마소

왜란의 긴 세월 가슴 시린 한을

 

(원문)

 

쌍절암의 두 여인 / 기영석

 

오백 년의 애틋한 사연이 묻힌

임진왜란의 왜군을 피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시누이와 올케

슬픈 대동산 암벽에 새겨진 세 글자

 

낭떠러지 아래 낙동강 물 흐르고

저 멀리 윤슬 위엔 왜가리가

배고픈지 미동치 않고

여인의 절개를 지키려 나래를 편다

 

음지 샛바람 넘칠 때

물에 노닐던 물고기와 위를 떠다니는 청둥오리

하루의 자맥질이 이어진다

 

애잔한 사연 안고 소리 없이

밤낮을 모른 채 유유히 흘러만 가는데

슬픔의 산자락에는 정적만이 찾아온다

 

앙증스러운 둘레길에

멍하니 홀 긴 듯 길 재촉하니

뒷사람 발소리에 오싹하고 으쓱해진다

 

한 품은 여인은 낙화가 되었건만

저버린 나라를 원망이나 하지마소

왜 놈을 저주하는 두 여인의 한을.

 

 

노트 : 낙동강변의 바위 절벽. 높고 가파른 이 절벽에는 500여 년 전 애틋한 사연이 묻어 있다. 바로 임진왜란을 맞아 마을로 쳐들어온 왜군들을 피해 두 여인이 목숨을 초개처럼 던진 곳이다. 

매오 정영후의 아내인 청주 한씨와 그의 시누이인 정소저는 그때 나이 각각 24세와 19세였다. 정소저는 당시 비녀도 꽂지 않은 처녀였다고한다. 왜병의 침입에 항거하여 대동산 절벽 쌍절암에서 낙동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한 것을 선조 임금께서 들으시고 교지를 내려 종택의 대문 밖에 정려를 짓고 그 행적을 비문으로 지어 세운 것이 쌍절각입니다.

쌍절각은 지금도 마을 앞에서 우망마을의 절개와 선비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마을 앞 동산은 예부터 "청룡등"에는 용이 낙동강 물을보고 달려가는 형상이라 지리 여건상 보호하는 산이고,  왜가리 떼가 기거하면 우망과 별실 양촌이 부흥하며, 왜가리가 오지 않으면 두 마을이 가난 해 진다는 속설이 있어서 보호조에 속합니다. 현제는 쌍절암생태숲길이 조성되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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