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 219

소꿉의 첫사랑

소꿉의 첫사랑 / 풍호 기영석 긴 머리 뽀얀 얼굴 반들거리는 까만 눈 뒷동산 솔나무 아래 우연히 정이든 너와 나 해 뜨면 누가 볼라 멀리서 손짓하고 밤이면 만남의 장소 속삭이며 정 주었던 너 옛 추억 아련히 스치고 깔깔되며 웃어주던 너를 철부지 불장난 인연이라고 아린 아픔 가슴속 묻어두고 훗 날 만남을 소원하며 애절한 보고픔 가슴 저미는 밤을. 190413

하얀 물안개

하얀 물안개 / 풍호 기영석 하늘엔 먹구름 드리우고 잔잔한 강물에 소리 없이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강을 동여맨 월영교 아래에는 물 위를 나타났다 지우며 수없이 동전 물결만 일렁인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우산 속 연인들의 뒷모습 아름답고 정겨워 보이는데 물속에서 입김을 토해내며 바람에 일렁이는 물안개가 모든 것을 하얗게 집어삼킨다. 190630

그 옛날 여름밤에

그 옛날 여름밤에 / 풍호 기영석 시골 마당에 멍석 깔아 잡풀로 모깃불 피우면서 둘러앉은 마을 사람들 땀에 찌든 몸을 웅덩이에 목욕하고 우물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시원하게 등목 하니 인심 좋은 이웃사촌 강낭 감자 삶아 오면 개떡 장떡 함께 먹으며 밤이 즐거웠던 그 시절 등불 하나 불 밝혀 밤늦도록 팔 베개 드러누워 깜깜한 하늘만 쳐다보며 반짝이는 별들만 세다가 잠들고 깨어보니 찬 이슬만 남았어요. 190720

어림호

어림호 / 풍호 기영석 고즈넉한 산 위에 하늘호수 하나 산천의 아름다움이 눈을 호강시켜준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공기 서늘한 바람은 너무 정겹다 쪽빛 호수에 비친 한 폭의 산수화는 거꾸로 매달려 일렁거리고 파란 하늘 조각구름은 물속에서 흘러만 가는데 확 트인 창공을 새처럼 날고 싶은지 삶에 찌든 옆지기가 두 팔 벌려 아~ 너무 좋다 가슴속 응어리 토해내듯 소리친다 190503

두견이의 합창

두견이의 합창 / 풍호 기영석 생동감 넘치는 초록의 계절 멀리서 카랑카랑한 울림의 소리 내 마음 아는지 모르는지 쉼 없이 슬프게도 울어주는구나 절규의 부르짖음 메아리 되어 귓전에 맴돌고 가고 오는 것이 섭리인 걸 너는 알겠지 바람에 날리는 뿌연 송홧가루가 골 안개처럼 몰아치는 그늘에 앉아 조각난 파란 하늘을 쳐다본다. 190520

미륵이 된 인조 과

미륵이 된 인조 과 / 풍호 기영석 새집 지어 잘 살라며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두 손에 들고 오신 보물 냉장고 위 덩그러니 올려진 두 그루의 나무엔 진짜 같은 인조 과일 십오 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에서 우릴 지켜주신 고귀한 마지막 아버지의 선물이다 임 떠나고 없는 빈자리 시아버지의 유품이라며 씻어주고 닦아주는 며느리 고이 간직하려는 섬김에 지금도 변하지 않은 색깔이 너무 곱다 아이들의 볼같이 예쁜 사과 여덟 개 색깔 고운 감귤 여덟 개는 임의 바람일까 현실로 이어진 보살핌의 혼령이 서려 있다 이 아들은 텅 빈 마음으로 온밤을 지새우며 쳐다보고 눈물을 참아 봅니다 거실 공간에서 삶의 단안을 알려주시고 가족의 평안을 지켜주시는 미륵으로 지켜준다는 것을. 190330

님의 안식처

님의 안식처 / 풍호 기영석 오 남매 곱게 길러 짝지어 주시드니 좋은 날 큰 산 양지바른 산기슭에 흙 지붕 집을 지어 가셨습니다 내 딸 시집가던 전날에는 집 앞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지만 문까지 잠겼는지 아무 대답 없더이다 행여 못 들었나 땅을 치며 통곡하니 나목 위의 새들이 푸드덕 떠나가고 소리 내 불렀지만, 눈물만이 위로하네 님 옆에 드러누워 슬픔의 잠 들 즈음 내 새끼 키우기에 바쁜 나날 보내면서 어른 되어 알고 나니 불효됨을 알았어요 눈뜨고 돌아보니 석양의 노을만이 애잔한 목소리로 집에 가라 일러주네 190308

삼강주막

삼강주막 / 풍호 기영석 슬픈 애환이 서려있는 해화 나무 아래 사각의 집 한 채 길손들의 수많은 사연 담아 노 젓는 뱃사공은 간데없고 해 저문 강둑에서 멍하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며 그리운 님 생각에 얼마나 울었을까 슬픈 사연 가슴에 숯덩이 되어버린 주모는 어딜 가고 보이지 않는다 그님을 흉내 내어 꾸며진 관광지 모여든 주객은 한상 차림 받아 들고 주거니 받거니 막걸리에 취해 횡설수설 하지만 추억만은 남긴다 190323

쌍절암의 두 여인

쌍절암의 두 여인 /풍호 기영석 애틋한 사연 담아 암벽에 새겨진 세 글자 순절한 시누이와 올케 한 품어 낙화되었건만 저 멀리 윤슬 위엔 왜가리가 미동치 않다가 절개를 지키려 나래를 편다 음지 샛바람 차가운데 오리들 자맥질 이어지고 애잔한 마음 멍하니 홀 긴 듯 강 건너 외산을 바라본다 슬픔의 눈물은 강물 되어 흐르고 저버린 나라 원망일랑 하지 마소 왜란의 긴 세월 가슴 시린 한을. 190403

그 길

수십 년 동안 신발창이 닳고 닳도록 어머니가 다녔던 추억 속 그 길 병아리보다 더 귀엽고 앙증맞은 발로 아장아장 걷는 예쁜 손주 보며 건강하게 잘 살아달라고 저 멀리 푸른 소나무 아래서 웃음 지며 기도하셨던 어머니 산모퉁이 돌아 좁다란 그 오솔길 초로에 바지 젖을까 조용히 말씀하시던 감미로운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서 맴돕니다 세월 따라 변해버린 그 길 틈틈이 당신의 발자국 따라 뭉클한 가슴 조이며 그날의 추억들이 나를 울립니다. 190215